제1화
“죄송합니다, 박은영 씨. 수술 골든 타임을 놓쳤어요...”
박은영은 자궁암 확진 진단서를 들고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유태진의 비서 조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사모님, 무슨 일이시죠?”
박은영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꽉 잡았다.
“태진 씨 옆에 있으면 바꿔주세요.”
“대표님 지금 바쁘십니다.”
“전화 좀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조기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진 씨, 대체 무슨 서프라이즈이길래 이렇게 신비롭게 굴어요?”
“머리 들어봐.”
별안간 박은영이 뼛속까지 익숙한 그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자상함이었다.
곧이어 조기현이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 시각.
펑.
항구 맞은편에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은영은 사색이 된 채 겨우 머리를 들었다.
찬란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현란한 색채가 짙푸른 밤하늘을 환히 밝혔다. 그건 마치 전설처럼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병원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얘기 들었어? 저거 지금 로열 그룹 유 대표가 여자친구 생일파티를 열어주느라고 불꽃놀이 하는 거래. 저 불꽃놀이만 해도 무려 40억이라는데!”
“여자친구가 서연주잖아. 서던 켈리 박사 출신이라 국내 최고 기업들이 앞다퉈 스카우트하려는 엘리트야. 능력 좋지, 예쁘지, 집안까지 으리으리하지, 게다가 남자친구도 잘생기고 능력자네!”
“이러니까 유 대표도 여친 사랑이 지극하지. 이런 여친 옆에 두면 얼마나 폼나겠어!”
박은영은 화려한 불꽃놀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진단서를 잡은 손에 서서히 힘을 풀었다.
진단서는 바닥에 스르륵 떨어졌고 그녀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그날 새벽.
유태진이 집에 돌아왔을 때 박은영은 불도 안 켜고 거실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불을 켰다.
“왜 아직도 안 자?”
이 남자는 외투를 팔에 걸치고 깊고 검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변함없이 냉랭한 태도였다.
전에는 태생이 차갑고 도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에야 알게 됐다. 오직 그녀한테만 냉랭할 뿐 딴 여자 앞에선 활활 타오르는 불씨였다.
“잠이 안 와서요.”
그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요.”
유태진은 외투를 소파에 내던지고 개의치 않은 듯 물었다.
“의사가 뭐래?”
앞서 박은영이 줄곧 배가 아프다고 해서 함께 병원에 다녀오기로 했으나 이 남자는 습관처럼 뒤로 미뤘다.
회사에 몇백억짜리 계약을 앞두고 있지 않으면 프로젝트에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고 핑계를 둘러댔다.
어젠 분명 함께 가주기로 했는데 서연주가 유태진 몰래 생일파티를 연다고 하니 회사에서 부랴부랴 달려간 유태진은 해줄 수 있는 게 불꽃놀이밖에 없었다.
한편 박은영은 아예 뒷전이었다.
“별일 아니래요.”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오늘은 왜 집에 돌아왔어요?”
유태진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고 목에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
이어서 잠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 요즘 배란기잖아. 우리 집안 대를 이어주겠다고 매달 요 며칠은 기어코 함께하자더니 그새 네가 한 약속 다 잊었어?”
유태진의 몸에 밴 여자 향수 냄새가 너무 짙어서 마치 비수처럼 박은영의 심장을 찌르고 억지로 추켜세운 자존심까지 짓밟아버렸다.
그의 말대로 결혼 3년 동안 줄곧 박은영에게 냉랭했지만 할머니가 꼭 유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강요한 탓에 매달 그녀의 배란기에 맞춰서 마지못해 집에 돌아와 그 짓거리를 하고 있다.
‘아이를 낳자고? 불가능할 것 같은데...’
박은영이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는 성격도 온순하고 이제 순종적으로 길들여 졌지만 오늘만큼은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나랑 하는 거 여자친구가 질투할까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녀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마치 작은 야수가 드디어 송곳니를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유태진은 진지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눈빛이 서늘해졌다.
한참 후 그가 가볍게 웃었다.
“뭐가 걱정이야. 어차피 우린 비밀결혼이라 너야말로 내놓기 부끄러운 존재잖아. 조연으로 살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무슨 요구가 이렇게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