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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7화

심가희의 분노가 아무런 전조 없이 터져 나와 박은영조차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유태진이 그 힘에 밀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중심을 잘 잡아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심가희를 훑어보는 검은 눈동자에 기쁨도 분노도 드러나지 않았다. 박은영은 유태진이 여자와는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가희는 이미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박은영의 병 때문에 가뜩이나 속상해서 미칠 지경인데 원인 제공자를 눈앞에서 보고 나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너 같은 인간이 오히려 더 멀쩡하게 사는 건데? 대체 왜? 은영이한테 정신적 폭력을 가한 것도 모자라 불륜까지 저질러놓고 모든 고통을 은영이 혼자 떠안게 한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심가희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고 맹렬히 비난하는 상대가 유태진이라는 사실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박은영의 억울함과 고통만 생각했다. 이 분노는 진작 터져 나왔어야 했다. 유태진은 심가희를 조용히 쳐다봤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눈빛도 한없이 깊었다. “가희 씨가 은영이 절친으로서 나서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평소에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린 심가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이유는 무슨 이유? 네가 한 짓 중에 억울한 게 하나라도 있어? 유태진, 너만 아니었어도 우리 은영이 지금보다는 천 배, 만 배 더 잘 살았어. 너 때문에 우리 은영이가 이렇게 된 거라고!” 박은영은 심가희가 분노하다가 모든 걸 털어놓을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 이성을 되찾고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심가희의 말에 유태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실 작년 이전에 그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몇 초간 침묵한 뒤 그의 시선이 박은영의 얼굴에 머물렀다. “나랑 함께했던 시간 동안 힘들었던 게 있었다면 가희 씨처럼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것이지, 왜 아무 말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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