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주이찬의 난폭함
문이 닫힌 뒤 사무실 내부는 키보드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남자는 기획서를 작성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자꾸만 저 멀리 흩어졌다.
저도 모르게 창가 앞으로 간 주이찬, 자연 햇빛을 좋아하는 그였기에 사무실에는 매우 큰 통창이 있었다. 오늘은 기온이 35도까지 치솟을 정도로 더운 날씨라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유수진 얼굴의 핏기와, 땀에 흠뻑 젖어 목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선명히 보였다.
회사 일대 주변은 모두 오피스 건물로 먹고 마시는 가게들은 다른 거리에 있었기에 해를 피할 그늘진 곳은 찾기 어려웠다. 유수진은 비록 그늘이 있는 곳에 서 있었지만 시간대가 정오인 만큼 해가 제일 중앙에서 내리쬘 때라 피할 곳이 거의 없었다.
주이찬의 얼굴은 즉시 어두워졌다.
유수진은 더위에 약해 고등학교와 대학교 두 번의 체육 대회에서 열사병으로 다섯 번 넘게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땡볕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주체할 수 없이 커지는 마음속 걱정에 주이찬은 예전 유수진의 무정함과 단호함을 떠올리며 커튼을 닫았지만 손에 든 자료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지후가 투자기획서를 들고 와서 설명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딴 데 팔려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듣고 있어.”
“그래도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인 도지후는 즉시 주이찬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평소에는 열려있던 커튼이 지금은 닫혀 있는 것을 흘끔 보더니 한마디 했다.
“사무실이 밝은 게 좋다며? 특히 자연광이 좋다고 했었잖아. 오늘 왜 커튼을 모두 닫아놓은 거야?”
계획서를 보고 있는 주이찬은 별일 아닌 듯 그냥 넘기려 했다.
한편 창가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본 도지후는 이내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미인에 홀려 정신을 잃었나 보군.”
주이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투자기획 상의하러 온 거 아니었어?”
“난 일 얘기보다 다른 이야기가 더 궁금해. 여자 얘기 같은 거.”
도지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이찬을 보며 말했다.
“내가 설명한다고 진짜 네 귀에 들어갈까?”
“듣고 있다고 했잖아.”
주이찬이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여.”
도지후가 한마디 지적했다.
“게다가 내 기억에 유수진은 매우 더위를 탔었지, 예전에도 더위를 여러 번 먹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오늘 기온이 35도에 육박할 정도로 무더운데 아래에 저렇게 서 있으니... 여기서 기획서 듣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중에 내가 알리지 않았다고 나를 탓할 거잖아.”
“유수진은 아무 일도 안 생겨.”
도지후와 이 얘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은 주이찬은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투자기획서 이야기나 계속해.”
“유수진 진짜로 저대로 내버려 두려고?”
도지후가 창밖을 한 번 더 힐끔 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 들어올 때부터 얼굴과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어. 지금은 걸음걸이도 불안정해. 곧 쓰러질 것처럼 말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표이사 자리에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지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누군가 유수진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실 약간 어지럽긴 했지만 그래도 서 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기업 신유인 만큼 건물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그러니 개인 주치의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유수진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람이 바로 송서진이었다는 점이었다.
송서진과 주이찬은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사이가 안 좋았다. 대학교에 간 후 송서진은 해외로 유학을 가 의학을 공부했다.
그런 송서진이 신유 그룹에서 개인 주치의로 일하다니?
큰 인재를 너무 작은 곳에 쓰는 거 아닌가?
송서진이 진찰 후 말했다.
“미세한 열사병 증상이지만 큰 문제는 없어. 이 약 한 병 마시고 물 많이 마시면 돼.”
유수진은 약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웃으며 말했다.
“물 많이 마시면 될 거야.”
“열사병 가볍게 넘기다가 큰일 날 수 있으니까 그냥 마시는 게 좋을 거야.”
송서진은 약을 권하며 물건을 챙겨 떠날 준비를 했다.
“넌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니까 조심해.”
송서진 곁에 함께 있던 도지후는 한마디 한 후 윙크를 날렸다.
유수진은 고맙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에 주이찬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유수진은 또 무엇이 주이찬을 이렇게 화나게 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경찰이 사건을 취소하려면 24시간 이내에 해야 된다고 했어. 강미나를 좀 봐주면 안 될까? 정말 착한 아이야, 요즘 시험을 준비하느라...”
“대갓집 딸인 유수진 씨는 신분이 귀하니 시간을 마음껏 낭비할 여유가 있겠지만 나 같은 하찮은 인부들은 밤낮으로 일해야 해. 유수진 씨와 다르니까. 할 일 없으면 나가.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계속해서 모욕을 당하자 유수진도 화가 났다.
“나를 미워하는 거 알아. 하지만 미워하는 건 미워하는 거고 강미나는 강미나야. 강미나는 우리와 상관없어. 너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혹시라도 전과가 생기면 앞으로 취직도 힘들어질 거야. 너...”
유수진의 말을 끝까지 들을 인내심이 없는 주이찬은 약을 그녀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마시고 꺼져. 네 헛소리 들을 시간 없어.”
화가 난 유수진은 약을 바닥에 내던진 뒤 성난 눈으로 주이찬을 노려보며 말했다.
“미친놈!”
주이찬은 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죽어. 내 회사 더럽히지 말고!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네가 경찰서에 전화 한 통만 하면 바로 갈게. 평생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순간 숨이 턱 막힌 주이찬은 그동안 쌓였던 우울함과 분노가 거침없이 밀려왔다. 유수진이 바닥에 내던진 약을 들더니 유수진의 턱을 꽉 움켜쥐고는 입에 직접 부어 넣었다.
“너 뭐하는 거야... 콜록...”
너무나도 거친 주이찬의 행동에 유수진은 아파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역한 액체가 입안에 퍼지며 이내 쓰고 떫은 맛이 나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삼켜. 여기 바닥 더럽히면 절대 가만 안 둘 거니까!”
냉랭하기 그지없는 경고의 말투, 이미 삼킨 것을 어떻게 토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이찬의 무례함과 거친 행동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동안 지켜온 체면이 한순간 무너졌기 때문이다.
찰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