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한예빈 씨, 죄송하지만 더는 한예빈 씨 오빠의 사건을 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예빈 씨도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주경 그룹은 현재 압도적인 기세로 성장하고 있어요. 예전의 한씨 가문보다 훨씬 더 발전했죠. 솔직히 그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우산을 든 한예빈은 서류를 꽉 쥔 채 트루헤븐 룸살롱 앞에 서 있었다.
낮에 변호사가 했던 말을 떠올린 한예빈의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주경 그룹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렇다고 해도 난 끝까지 싸울 거야.’
한예빈의 오빠는 누명을 썼다. NG4-307은 한예빈의 오빠가 수많은 밤을 지새워 연구해 낸 것인데 주태영이 그의 성과를 탈취하고 그에게 표절이라는 누명을 씌웠고, 그 탓에 한예빈의 오빠는 현재 감옥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변호사는 자리를 뜨기 전 그녀에게 오늘 밤 변호사 협회의 사람들이 트루헤븐에서 해외에서 돌아온 유명한 변호사의 귀국 축하 파티를 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오늘 운이 좋다면 그녀의 사건을 맡아줄 변호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예빈은 오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빛이 바랜 VIP 골드 카드를 꺼낸 한예빈은 한때 집처럼 편히 드나들었던 호화로운 트루헤븐으로 들어갔다.
7년 전, 한예빈은 돈을 물 쓰듯 하던 재벌가 한씨 가문의 딸로 하룻밤에 유흥비로 수천만 원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예빈은 잔인한 현실 앞에 굴복해야만 했다. 그녀는 오빠의 누명을 벗겨야 했고 아픈 딸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했기에 만 원조차 전전긍긍하며 써야 했다.
한예빈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복도를 지나 변호사들이 모여 있는 룸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룸 안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뚝 끊기며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예빈에게로 향했다.
고개를 든 한예빈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오늘 옅은 화장을 했고, 검고 긴 머리카락은 살짝 웨이브를 넣어서 풀어헤쳤다.
검은색의 원피스는 한예빈의 아름다운 몸 선을 그대로 드러냈고 치맛자락은 그녀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살랑거리며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안녕하세요.”
한예빈은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한예빈이라고 합니다. 7년 전 기성 테크의 한진성이 저희 아버지고 한예훈이 저희 오빠예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 한예빈 씨였군요.”
느끼하게 생긴 변호사가 한예빈의 말허리를 끊으며 음험한 눈빛으로 한예빈의 몸을 훑어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그사이 더 예뻐졌네요. 흠... 색기도 좀 흐르는 것 같고.”
룸 안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한예빈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변호사들에게 건넸다.
“저희 오빠는 누명을 썼어요. 이건 제가 찾은 새로운 증거들인데 한 번 봐주시면...”
그러나 한예빈이 준비한 서류들은 이내 바닥에 떨어져 사정없이 짓밟혀졌다.
“이젠 포기해요. 증거가 확실한 사건인데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이 서류들부터 보시고...”
“볼 필요 없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린 한예빈은 허선웅의 경멸 어린 눈빛을 보게 되었다.
한때 한진성의 앞에서 굽신대던 허선웅이 지금은 술잔을 들고 거만하게 한예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예빈 씨, 정신 차려요.”
허선웅이 코웃음을 쳤다.
“한예빈 씨, 한예빈 씨 신분과 주경 그룹의 지위를 생각해 봐요.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됐을 텐데 왜 아직도 이렇게 순진한 거죠?”
한예빈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허선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허 변호사님, 저희 아버지와 오빠는 허 변호사님에게 잘해주셨죠. 그러니까 부탁인데...”
“안 돼요.”
허선웅은 바로 거절했다.
“이건 뒤집을 수 없는 판결이에요. 그러니까 한예빈 씨도 이만 포기하도록 해요. 그럴 시간에 얼른 결혼이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허 변호사님, 그런 말씀은 삼가시죠. 한예빈 씨가 진 빚이 얼마인데 누가 한예빈 씨랑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정장 차림의 다른 변호사가 끼어들며 추잡한 눈빛으로 한예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 정도 얼굴에 저 몸매면 연인으로 삼기엔 적당하겠네요.”
“그런데 한예빈 씨는 그동안 남자를 몇 명이나 만나봤어요?”
누군가 악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한예빈 씨랑 죽고 못 살던 그 경호원과 전남편인 송유겸 씨를 제외하고 또 있나요?”
“도움을 받고 싶다면 일단 한예빈 씨의 조건부터 밝혀야 하지 않겠어요?”
“이미 아이까지 낳은 몸인데 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나요? 당연히 바로 탈락이죠.”
추접스러운 말들이 독사처럼 한예빈의 몸을 옭아맸다.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날 선 말들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가차 없이 찔러댔다.
한예빈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 때까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아프지 않아. 전혀 아프지 않아.’
한예빈은 그렇게 자신을 세뇌했다. 오빠를 구하는 길은 가시밭길이었기에 반드시 버텨야 했다.
한예빈은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문이 열리며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법조계 엘리트들이 이렇게 수준 낮은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당황한 한예빈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정장 차림의 훈훈한 남자가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감사 인사를 하려던 한예빈은 남자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온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바로 강윤오였다.
그 순간 6년 전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예빈은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한씨 가문의 귀한 딸이었고, 강윤오는 한진성이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여 고용한 그녀의 경호원이었다.
둘은 한때 뜨겁게 사랑했었다.
한예빈은 강윤오의 구릿빛 피부에 남은 흉측한 흉터를, 그의 허리 아래 새겨진 그녀의 이니셜 YB를, 비가 쏟아지던 날 밤 강윤오가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목숨 걸고 그녀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을 때의 눈빛을 기억했다.
그러나 한씨 가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함정에 빠졌을 때, 한예빈의 아빠가 투신자살하고 한예빈의 엄마가 심장병으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시고 한예빈의 오빠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목숨 걸고 그녀를 지키겠다던 강윤오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예빈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비틀거렸다.
“조심해요.”
앞에 서 있던 고민준이 빠르게 한예빈을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요?”
한예빈은 힘겹게 중심을 잡은 뒤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지금은 추억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한예빈은 들고 있던 서류를 고민준에게 건넸다.
“이것 좀 봐주세요. 저희 오빠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어요. 오빠는...”
“죄송해요.”
고민준이 난감한 얼굴로 한예빈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저희 로펌은 개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주경 그룹과 싸울 힘이 없어요.”
또 한 번 희망의 빛이 꺼졌다.
입술을 깨문 한예빈은 피비린내를 느꼈다.
“고 변호사님, 뒤에 계신 분은 누구죠?”
허선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황한 얼굴로 강윤오를 살펴보았다.
고민준이 웃으며 소개했다.
“강윤오 씨입니다. 월스트리트에서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변호사죠. 3년 동안 한 번도 패소한 기록이 없는 전설 같은 존재입니다.”
룸 안에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방을 떨던 변호사들은 곧바로 표정이 뒤바뀌더니 우르르 몰려가서 아부를 떨기 시작했고, 그들 때문에 한예빈은 벽 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예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가식을 떠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을 바라보며 역겨움을 느꼈다.
강윤오가 왔으니 그들은 더욱더 한예빈을 도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룸 안에서 나온 한예빈은 복도의 차가운 벽에 기댄 채로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룸 안에서 강윤오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고민준, 이 사람들이 네가 소개해 주겠다던 사람들이야?”
강윤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변호사로서 여성을 모욕하다니, 서울 변호사 협회 수준은 정말 상상 이상이네.”
말을 마친 뒤 그는 몸을 돌렸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협력할 필요가 없겠어. 네 로펌에는 내가 투자하겠어.”
고민준은 순간 눈을 빛내며 빠르게 강윤오를 따라나섰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가려는데 고민준이 눈빛으로 그들에게 경고를 날렸다.
“윤오야, 정말 나한테 투자할 거야?”
고민준이 들뜬 얼굴로 강윤오를 뒤따랐다.
강윤오는 걸음이 아주 빨랐다.
“잠깐만 기다려. 왜 그렇게 빨리 걸어? 아까 그 말 나는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번복할 생각은 하지 마. 너는 반드시 우리 로펌에서 일하며 전설을 써 내려가야 해.”
“윤오야, 너 대체 왜 그래?”
고민준은 그를 바짝 뒤쫓다가 이미 걸음을 멈춘 강윤오의 등에 부딪쳤다.
고민준은 아픈 코를 문지르며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강윤오가 벽에 기댄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가녀린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한예빈 씨랑 아는 사이야?”
고민준이 물었다.
강윤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잘 모르는 사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혹시 한예빈 씨 오빠의 사건에 관심이 있는 거야?”
“그냥 좀 궁금해서.”
강윤오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차갑게 웃었다.
“송유겸이랑 결혼했으면서 왜 변호사를 선임 못하는 거야?”
“둘이 이혼한 지가 언젠데.”
고민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강윤오는 몸을 홱 돌리며 날 선 눈빛으로 고민준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혼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