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고민준은 예상치 못한 강윤오의 반응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혼한 지 몇 년 됐을 거야.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이혼했던 걸로 기억해.”
강윤오의 시선이 다시금 한예빈에게로 향했다. 한예빈의 가녀린 뒷모습은 계단 쪽에서 사라졌다.
강윤오는 본능적으로 한예빈을 따라가려다가 조금 전 룸 안에 있던 변호사들이 한예빈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 말을 떠올리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왜 안 쫓아가?”
고민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는 강윤오를 바라보았다.
“가자. 처리할 일이 있다면서.”
강윤오는 차갑게 웃으며 느린 걸음으로 한예빈이 사라진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예빈은 자신이 어떻게 룸살롱에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차가운 빗물에 옷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빗방울이 뜨거운 눈물과 뒤섞여 어떤 것이 빗물인지, 어떤 것이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머릿속에 지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예빈은 음습한 버려진 창고 안에서 강윤오를 처음 만났다.
만 열일곱 살의 한예빈은 납치범에게 납치당해 머리에 총이 겨눠진 상태였는데 당시 군복을 입은 강윤오가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한예빈을 지켜냈다.
강윤오가 오른 어깨에 총을 맞는 순간, 그의 뜨거운 피가 얼굴에 튀었던 그 감각을 한예빈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강윤오가 부상 때문에 전역하여 그녀의 경호원이 되었을 때 그들은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다.
당시 강윤오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정말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말수가 적었다.
비록 그는 경호원이라는 직업에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그럼에도 늘 책임을 다했다.
한예빈이 고열을 앓을 때면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고, 그녀가 파티에서 성희롱을 당하면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써서 그녀를 지켰으며, 한예빈이 짓궂게 장난을 쳐도 그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한예빈은 그런 강윤오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하며 그가 자신에게 깊이 빠져들게 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탐했었고 그로 인해 침실에도, 주방에도, 거실에도 그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한예빈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집안에 문제가 생긴 뒤 받은 편지를 통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강윤오의 음모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강윤오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한예빈의 곁에 있은 이유는 한씨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옷깃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엄청난 한기가 느껴져 한예빈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하이힐은 어느샌가 사라져 빗물로 질벅질벅한 땅을 맨발로 걸었다. 유리 조각을 밟아 발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는데도 한예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자. 네가 어디로 가든 꼭 따라갈게...”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리자 한예빈은 주춤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 위로 빗물이 떨어져 발신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혹시 한여음 어머님 맞으신가요?”
전화 너머에서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여음이가 갑자기 심장병이 악화해서 지금 위험한 상황이에요. 얼른 운하 병원 응급실로 와주세요!”
간호사의 말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한예빈은 곧바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여음은 그녀의 딸이었다.
거대한 공포가 엄습하자 한예빈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가엾게 몸을 떨었지만, 동시에 어디서 생긴 힘인지 엄청난 속도로 비를 뚫고 길가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어서, 어서 운하 병원으로 가주세요!”
아무리 괴로워도 강윤오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었고, 지금 그녀는 아픈 딸과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오빠를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유일한 버팀목이니 절대 쓰러질 수 없었다.
...
운하 병원 응급실 밖의 복도에서는 자극적인 소독약 냄새와 함께 싸늘한 절망이 느껴졌다.
한예빈은 마치 영혼을 빼앗긴 조각상처럼 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 너머로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병상 위에 누워있는 딸 한여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을 짓뭉개놓는 것처럼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벅찼다.
만약 딸이 태어날 때부터 병마에 시달릴 줄 알았더라면 집안이 망한 뒤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이기심이 그녀의 딸을 해친 셈이다.
그러나 이미 낳았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
집안이 망한 뒤 그녀가 짊어져야 했던 거액의 채무, 그리고 오빠의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와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조차 한예빈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녀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팔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팔고 매일 쉴 틈 없이 일해도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1억 2천만 원.
조금 전 의사가 한 말은 한예빈에게 냉혹한 판결처럼 들렸다.
“여음이는 지금 상태가 굉장히 심각해요.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하는 게 좋아요. 비용은 최소 1억 2천만 원이에요.”
예전의 한예빈에게 1억 2천만 원은 큰돈이 아니었으나 지금의 한예빈에게 그것은 그녀를 짓눌러버릴 수 있는 거대한 산과 같았다.
한예빈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서서히 주저앉았다. 젖은 치마 너머로 차가운 타일 바닥의 한기가 스며들었다.
한예빈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무너져서는 안 돼. 무너질 수 없어.’
부모님을 잃은 마당에 다른 가족들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오빠에게도, 딸에게도 그녀가 필요했다.
‘겨우 1억 2천일 뿐이잖아.’
1억 2천만 원이 아니라 12억이라고 해도 반드시 구해야 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드는 통증 때문에 한예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물로 흐릿해졌던 그녀의 눈동자에 남은 것은 차분함과 결연함뿐이었다.
한예빈은 휴대폰을 꺼내 유일하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었지만 동시에 아주 또렷했다.
“은서야, 혹시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어? 뭐든 상관없어.”
“한예빈, 너 미쳤어?”
한예빈의 친구 정은서가 놀란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하루에 일 세 개 뛰는 데다가 저녁에는 번역 알바까지 하잖아. 하루에 다섯 시간은 잘 수 있는 거야? 너 그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어.”
“난 괜찮아.”
한예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난 지금 돈이 필요해. 일을 많이 할수록 좋고 돈을 빨리 벌수록 좋아.”
전화 너머 정은서가 잠시 침묵했다. 정은서는 한예빈을 너무 잘 알았다.
“얼마나 필요한데?”
“1억 2천만 원.”
한예빈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는 굳게 닫힌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마치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듯이 힘겹게 말했다.
“여음이... 심장병이 재발했어.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대. 은서야... 나는 여음이를 잃을 수 없어.”
정은서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있긴 한데...”
정은서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무 위험해. 특히 너처럼 예쁜 애한테는 더.”
“나 할 수 있어!”
한예빈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의 그녀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예빈아, 거기 바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 혹시라도 누가 너한테 눈독을 들인다면...”
“그럼 오히려 잘 된 거지.”
한예빈이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자포자기하듯 말했다.
“난 지금 돈이 부족하잖아.”
“예빈아...”
“나 오늘 강윤오 씨를 봤어.”
한예빈이 갑자기 정은서의 말을 끊었다.
“윤오 씨를 보니까 내가 너무 우습더라. 윤오 씨는 우리 집안 사람들을 배신하고 누구보다도 잘살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나 좋다는 남자들을 다 거절했잖아.”
전화 너머에서 정은서의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한예빈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고 그 탓에 복도에 있던 간호사들이 그녀 쪽을 힐끔댔다.
“배신자가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잘사는 거야? 내 진심을 짓밟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뻔뻔히 잘사는 거냐고!”
한예빈이 내뱉은 말들은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런 배신자들은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어야 해.”
정은서는 더는 한예빈을 설득하지 않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방금 문자로 그 바 매니저 연락처 보냈어. 매일 저녁 세 시간씩 일하면 최소 120만 원은 벌 수 있을 거야.”
“고마워, 은서야.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한예빈은 눈물을 닦은 뒤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두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더없이 확고했다.
딸이 무사히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뒤에야 한예빈은 병원을 나섰다.
...
바 백야 안, 매니저 이지원이 한예빈 주위를 빙 돌더니 눈을 빛냈다.
“이 정도 얼굴과 몸매는 흔치 않은데. 은서가 왜 일찍 소개해 주지 않은 걸까요?”
한예빈은 자기도 모르게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잡아당겼다.
“그게... 요즘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요.”
“잘 찾아왔네요.”
이지원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여기 고객님들 중에 큰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마음에 들면...”
이지원은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예요.”
한예빈은 대꾸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며 직원을 따라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큰 음악 소리에 한예빈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높은 하이힐을 신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눈부신 조명 아래, 그녀는 마치 죽음을 앞둔 물고기처럼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괴로움을 느끼며 몸을 비틀었다.
“와.”
“엄청 예쁜데?”
무대 아래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막 백야 안으로 들어선 고민준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지? 또 누가 새로 왔나?”
강윤오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