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무대 중앙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허리를 흔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예빈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과거 한예빈은 그의 흰 셔츠를 입고 마당에서 하늘하늘 춤을 췄었고 그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당시 한예빈은 빨개진 얼굴로 강윤오에게 말했었다.
“사실... 섹시한 춤을 배웠어요. 윤오 씨에게만 보여주고 싶어요.”
그에게만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인데.”
고민준이 턱을 매만졌다. 그는 무대 위 여자가 한예빈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강윤오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이 창백해질 정도로 주먹을 힘껏 쥐었다.
그는 한예빈을 보지 않으려고 억지로 시선을 돌렸으나 마치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한예빈은 잔인하게 그를 버렸다. 그런데 그가 왜 한예빈을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와, 한예빈 씨였네.”
고민준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하더니 눈을 빛냈다.
“되게 말라 보이던데... 몸매가 꽤 좋네.”
강윤오는 고개를 홱 돌리며 섬뜩한 눈빛으로 고민준을 바라보았고, 고민준은 그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왜, 왜 그래?”
“쳐다보지 마!”
강윤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고민준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강윤오가 갑자기 옆에 있던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젠장, 어떤 놈이 감히...”
남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몸을 돌리자 강윤오는 태연한 얼굴로 옆에 있던 건장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때렸어요.”
다음 순간, 두 남자는 서로 얽혀서 싸우기 시작했고 이내 그들의 친구들까지 가세하며 바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고민준은 얼이 빠진 얼굴로 강윤오가 초래한 소동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그를 잡아끌고 VIP 구역으로 피신했다.
“미쳤어?”
무대 위 한예빈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 옆으로 유리잔 하나가 날아와 등 뒤에 있던 벽에 부딪혀서 깨졌다.
“어서 내려와요.”
직원이 무대 아래서 초조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잠깐 피해 있어요.”
뒤에 있던 이지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경비원에게 연락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어떤 미친놈이 감히 우리 바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거야?”
한예빈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자기도 모르게 치마를 꽉 쥐었다.
아직 돈을 벌지 못했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지원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이내 상황을 정리했다.
한예빈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려고 했으나 이때 이지원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서가 나한테 연락을 했어요. 은서는 예전에 저를 구해준 적이 있어서 저도 예빈 씨를 한 번 도와줄게요. 여기 꼭대기 층에 있는 308번 룸에 노수환 씨라고 있는데 작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어요.”
이지원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사람 꽤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떠난 아내랑 비슷하게 생긴 여자들만 찾거든요. 그런데 예빈 씨가 운 좋게 마침 그 사람 아내랑 조금 닮았어요.”
한예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기 한 번 가봐요. 노수환 씨가 예빈 씨를 마음에 들어 하면 앞으로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예요.”
한예빈은 망설였다.
“이건 기회예요. 노수환 씨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이지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구실을 못해요. 예빈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예요.”
“...”
“그러니까 지체하지 말고 바로 가봐요.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다른 기회가 올지 몰라요.”
한예빈은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딸을 떠올리며 눈을 감은 뒤 심호흡을 했다.
“갈게요.”
그녀는 이지원의 요구대로 흰색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묶어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냈다.
거울 속 한예빈은 청순하면서도 우아했다. 조금 전 무대 위에서의 요염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위층에 있으니까 바로 가봐요. 이미 얘기해 뒀어요.”
이지원은 한예빈을 밀면서 말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요.”
한예빈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문을 열면서 몇 번이나 연습했던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소파에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의 미소가 굳어버렸다.
강윤오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한예빈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뒤 강윤오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노수환 쪽으로 걸어가서 입을 열었다.
“노수환 씨, 저는 이지원 매니저님이 소개하셨던 한예빈이에요.”
노수환은 이지원이 말한 것처럼 신사답고 온화했다.
그는 눈앞의 아름다운 한예빈을 훑어보면서 놀란 눈빛을 해 보였다.
“역시 닮았어.”
곧이어 그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 여기 앉아.”
한예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강 변호사님, 고 변호사님, 사람 한 명 옆에 두는 것 정도는 괜찮죠?”
노수환이 한예빈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리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의논하려는 사건이 죽은 그의 아내의 사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고민준은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만 강윤오는 달랐다. 그는 사람을 죽일 것 같은 표정을 하며 잔을 꽉 쥐었다.
고민준은 강윤오의 손을 황급히 잡으면서 은근히 눈치를 줬다.
강윤오는 마치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예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모든 연기를 꿰뚫어 볼 듯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노수환조차 이상함을 눈치채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강 변호사님, 혹시 예빈이한테 관심 있어요?”
강윤오는 잔을 천천히 놓으면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한예빈은 순간 마음이 아려서 괴로웠으나 오히려 더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일부러 노수환의 손등에 자신의 예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마침 저도 저 변호사님보다는... 노수환 씨처럼 신사다운 사람을 더 좋아해요.”
노수환은 한예빈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웃으면서 그녀를 위해 와인을 따라주었다.
“말을 참 예쁘게 하네. 오늘 밤 남도록 해.”
“네...”
한예빈은 잔을 들며 술을 마시는 것으로 떨리는 입술을 감췄다.
고민준이 테이블 아래서 강윤오를 힘껏 발로 찼고, 그제야 강윤오는 시선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건을 논의했다.
노수환의 아내는 살해당했는데 범인은 찾았지만 지금까지 벌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강윤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노수환은 거액을 주고 강윤오를 모셔 온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노수환은 이따금 한예빈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고 한예빈은 그의 말을 듣고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예빈의 웃음소리에 강윤오는 괴로워졌다.
‘정말 잔인하네.’
강윤오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실에 가보겠다고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다.
룸 안에 따로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강윤오는 굳이 밖으로 나갔고 고민준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강윤오를 따라가는 건 적절치 않았기에 고민준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하여 노수환과 사건을 논의했다.
약 5분 뒤, 갑자기 정전이 되더니 밖에서 잇달아 놀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차단기가 내려갔나 봐요.”
고민준이 휴대폰 라이트를 켜면서 말했다.
“저는 강 변호사를 찾으러 가볼게요.”
한예빈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노수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디 가?”
“저...”
한예빈이 뭐라고 하기 전에 고민준이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예빈 씨, 매니저님이 찾으세요. 되게 급해 보였어요.”
한예빈은 마치 구원받은 사람처럼 빠르게 룸 안에서 나왔다.
복도로 나온 한예빈은 벽에 기대더니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강 변호사랑 무슨 사이예요?”
고민준이 옆에서 물었다.
“아무 사이 아니에요.”
한예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 변호사님은 어서 강 변호사님을 찾으러 가세요.”
고민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예빈은 저 멀리 빠르게 걸어갔다.
한예빈은 휴대폰 라이트를 들고 미약한 빛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코너를 돌자 갑자기 팔이 툭 튀어나와 한예빈을 끌어안더니 그녀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한예빈이 비명을 지르려는데 강윤오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