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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심은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실망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강우빈의 차가운 말은 언제나 칼처럼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얼굴의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그래, 알겠어.” 강우빈은 심은지가 날카로운 항변을 쏟아낼 줄 알았으나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에 의외라는 마음이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한서연이 말한 대로 심은지는 요즘 부쩍 야위어 있었다. 갑자기 그는 어젯밤의 구토가 단순한 질투 때문이 아니라 정말 몸이 힘들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강우빈은 잠시 머뭇거리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 비서가 네가 했던 일을 잘 맡아주고 있어. 이제 네 임무는 은우를 잘 돌보는 거야. 나와 한 비서의 관계도 이미 여러 번 설명했으니까 앞으로 더는 그 문제를 꺼내지도 마. 너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줘.” ‘후회?’ 정작 후회는 심은지가 하고 있었다. 가업을 포기하고 고작 강우빈의 아내라는 자리를 선택한 자신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한성 그룹을 배경으로 삼았던 그녀가 굳이 강우빈이라는 남자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심은지는 눈을 감고 바로 사직서를 꺼내 강우빈에게 건네며 예의를 차려 말했다. “강 대표, 받아. 사직서야. 내일부터는 정식으로 이 회사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강우빈이 급하게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심은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우빈은 당황하는 표정으로 사직서를 내려다보았다. 심은지의 서명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강우빈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억누르던 분노가 폭발하듯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나랑 기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야? 오늘 화해하러 온 줄 알았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강 대표, 난 그저 회사에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으니 사직서를 내는 것뿐이야.” 고개를 숙인 심은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십 년이야. 강호 그룹은 이제 예전의 강호 그룹이 아니고 보니까 다들 한 비서를 좋아하던데, 괜히 내가 껍데기뿐인 자리를 걸치고 월급만 받아 갈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게 낫지 않겠어?” 강우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심은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속내를 꿰뚫는 듯했다. “십 년을 들먹이며 날 죄책감으로 묶을 필요 없어. 강호 그룹이 지금껏 성장할 수 있었던 데 네 공이 크다는 것 나도 알아. 넌 훌륭한 직원이었어. 하지만 은우를 낳은 뒤로 단 한 번도 사업에 손을 댄 적이 없잖아. 그건 내가 널 배려한 거야. 집에서 아이나 잘 돌봐. 그럼 넌 언제까지고 강호 그룹의 안주인이 될 수 있어. 그 간단한 일조차 제대로 못 해내면서 지금 사직서를 내미는 건 무슨 심보야? 그건 곧 한서연을 세간의 화살받이로 내몰려는 거잖아? 심은지, 네 속내가 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너무 악독한 거 아니야? 그리고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서연에게 사과는 했어?” ‘사과? 내 가정을 파탄 낸 그 여자한테 지금 고개 숙여 사과하라고? 오히려 한서연이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심은지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나 악독한 여자야. 그럼 포기할 생각은 해본 적 없어?” 포기란 곧 이혼을 뜻했다. 사실 이 몇 해 동안 싸움이 격해질 때마다 그녀는 몇 차례 이혼을 입에 올렸었다. 하지만 번번이 언쟁으로 끝났고 강우빈은 절대로 이혼을 동의하지 않았다. 설사 바람을 피워도 심은지는 그의 여자로 남아야 했다. 경성에서 왕자님이라 불리는 만큼 강우빈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심은지가 처음 이혼을 꺼냈을 때는 진심이 아니었다. 강우빈의 말대로 그저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고, 그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심은지는 너무 지쳐 진심으로 이혼을 바라고 있었다. 이혼하고 서로 각자의 삶을 즐기고 아이도 서로 한 명씩 키울 수 있으니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얼굴빛이 더 어두워진 강우빈은 심은지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심은지, 마지막 기회야. 너 계속 이러면 은우에게 새엄마를 찾아주는 것도 고려하게 될 거야. 안 그래도 은우가 너랑 같이 있으면 행복하지도 않고 늘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나한테 항상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아내로서 엄마로서 이렇게 실패한 인생을 살고 싶어?” ‘실패라...’ 심은지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결국 매일 밤 네가 오길 기다렸다가 해장국을 끓여줬던 것도, 한겨울에 맞춤 정장을 손빨래하다 손이 부르튼 것도, 아이를 강씨 가문이 원하는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열심히 교육한 것도 전부 실패로 돌아오는구나. 이 집에 이제 더 이상 내 자리는 없구나.’ “그래, 미안했어.” 심은지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실패자는 조용히 물러서 줄게.’ 심은지는 맥없이 떨어뜨렸던 한 손으로 휴대폰 카운트다운을 눌렀다. 남은 시간, 열네 날.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모든 걸 정리하고 두 번 다시 강우빈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완전히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심은지의 태도에 강우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심은지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강우빈이 다시 손을 뻗었으나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심장이 푹 찔린 듯 지끈거렸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점점 커졌다. 그는 찡그린 얼굴로 멀어져가는 심은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심은지는 건물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유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겉으로는 친한 친구라 불렀지만 사실 여섯, 일곱 해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사이였다. 유수아는 패션 디자이너였는데 거의 매일 전국을 오가며 여러 모델에게 맞춤 의상을 제작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남자 모델들과 접촉도 많았고 성인 남녀가 함께하며 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유수아는 남자 친구를 옷 갈아입듯이 갈아치우는 여자였다. 이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강우빈은 아이가 생긴 후 강은우가 괜히 나쁜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된다며 심은지가 유수아를 만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리하여 심은지는 무려 육 년 동안 소꿉친구와 인연을 끊었다. 오랜만에 걸려 온 심은지의 전화에 유수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전화를 받자마자 불만을 토로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아직 날 기억하고 있나 봐? 네가 완전히 사랑에 미쳐서 나 같은 건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연락을 다 하고? 왜?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씁쓸한 미소를 짓던 심은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우빈에게 모욕당해도 울지 않았고, 한서연에게 조롱받아도 울지 않았다. 심지어 십 개월을 품어 낳은 아이가 다른 여자에게 엄마가 되기를 바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수아의 목소리에 드디어 눈물이 터졌다. “그래, 나 후회해. 수아야, 나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데 늦지 않았겠지?”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들려오는 유수아의 목소리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나쁜 년!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 너 내가 지금까지 네 작업실을 지켜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예술계 사람들 전부 다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은지야, 비서 노릇 따위로 네 재능을 묻어두지 마. 넌 태어날 때부터 붓을 잡아야 하는 천재적인 화가야. 반 고흐와 같은 인상주의의 마지막 보석이라고. 난 줄곧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미안해, 수아야. 미안해.” 심은지는 길 한복판에 쪼그려 앉아 오열했다. 유수아의 말처럼 심은지는 원래 뛰어난 집안에서 타고난 재능으로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던 사람이었다. 강우빈조차 심은지가 대학 시절 이테리아 피렌치에서 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졸업 작품 하나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름을 올렸고 예술계를 들썩이게 했다. 그 후, 본명으로 내놓은 그림은 경매에서 9자리 수를 기록했다. 그런 심은지가 귀국한 뒤로 단련이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이 했던 전공과 전혀 무관했던 직장에 몸담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행정관리, 재무, 금융을 전부 새로 배우기 시작했고 결국 그 모든 일을 출중하게 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림을 포기한 지 10년 만에 심은지는 다시 붓을 들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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