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유수아와 작업실 인수인계 시간을 약속한 뒤 심은지는 다시 강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보름이라는 시간을 정한 이유는 지난 십 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일이 있었고, 정리해야 할 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강씨 가문 저택이었다. 넓디넓은 200평짜리 별장에는 도우미 하나 없었다.
단지 강우빈의 ‘복잡하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집 안 청소와 정리는 매일 심은지의 몫이었다.
그러니 떠날 때도 그녀는 완벽한 비서처럼 깔끔하게 물러나야 했다. 그것이 심은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한서연이 집안일을 할 리는 없었으니 남편과 아이를 위해 우수한 도우미를 뽑는 일도 심은지의 몫이었다.
낮에 시간을 이용해 심은지는 많은 사람을 면접하며 한 사람 한 사람 강우빈의 입맛에 맞춰 국을 끓여 보게 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그녀가 식사를 준비하던 중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어서 가정 주치의를 불러요!”
강우빈의 목소리였다. 임신한 몸이라 심은지는 피 냄새에 특히 민감했다.
코끝을 스치는 비릿함에 그녀는 금세 속이 울렁였고 본능적으로 걱정이 앞서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강우빈이 다친 건가?’
현관으로 달려가 보니 강우빈이 한 여자를 공주처럼 안아 들고 급한 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는 흰 눈이 펑펑 쏟아졌고 강우빈의 머리와 어깨 위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여자를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강우빈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주치의 불러오라니까!”
심은지는 소파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한서연이었다.
심은지는 두툼한 잠옷을 여미며 담담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언성을 높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강우빈은 한서연을 힐끗 노려보고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빚쟁이들이 달려들어서 어깨를 칼에 찔렸어.”
“빚쟁이? 누구에게 무슨 빚을 진 거야?”
심은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설마 강호 그룹의 대표가 파산이라도 한 건가?’
강우빈이 대답하기 전에 한서연이 창백한 얼굴로 애처롭게 속삭였다.
“죄송해요,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아버지가 밖에서 도박 빚을 졌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사람들이 제가 강 대표님 비서인 걸 알아냈더라고요. 그래서 밤길에 숨었다가 저를 납치하려 한 거예요. 제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이렇게 다치게 된 거고요. 다행히 강 대표님이 야근 중이셔서 지나가다 절 구해주셨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죽었을지도 몰라요.”
“헛소리하지 마.”
강우빈이 엄숙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내가 있으니 감히 너한테 어떻게 못 할 거야. 다만 지금 너희 집은 안전하지 않으니까 범인을 잡기 전까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 경찰에는 이미 신고했어.”
“안 돼.”
심은지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강우빈은 고개를 들어 심은지를 바라보았다.
도자기처럼 맑고 흰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희고 건강해 보였다.
사직서를 제출해서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쌓였던 친한 친구와의 오해를 풀어서인지 오늘따라 심은지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밝아 보였다.
발그스레 붉은 양 볼과 도톰한 잠옷을 걸친 모습은 마치 게으른 페르시아고양이처럼 여유롭고도 기품이 흘렀다.
강우빈은 비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결국 또 한서연을 질투하는구나.’
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심은지, 여기 강씨 가문의 저택이야.”
이 집의 주인은 강우빈 자신이니 이 집은 그의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안 돼.”
심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방이 부족하잖아. 침실이 없는데 어디서 재워?”
강씨 가문 저택은 세 층이었고 대규모 저택이지만 실제 침실은 세 개뿐이었다.
강은우의 방 하나, 심은지의 방 하나, 강우빈의 방 하나가 전부였다.
한때 손님방으로 있던 방은 신혼 시절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강우빈이 모두 개조해 버렸다.
호화로운 수유실, 드레스룸, 명품 전용 수납실, 심은지가 여유 시간을 보내던 꽃꽂이 실과 화실, 요가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세 개의 침실을 남긴 것도 언젠가 아들과 딸이 각각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현재는 부부가 각자 다른 방을 쓰고 있었다.
심은지가 겨우 이런 이유로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강우빈은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말했다.
“심은지, 네가 안방에 들어와서 자.”
그의 말은 심은지와 함께 다시 합방하자는 뜻이었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잠자리를 함께했으니 같이 자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삼 개월 전에는 강우빈이 취해 있었던 탓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미움조차 사라진 지금 더는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심은지가 똑바로 서서 고집스럽게 버티자 강우빈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침, 그때 졸린 눈을 비비며 강은우가 이층에서 내려왔다.
“아빠, 엄마, 왜 그래요? 또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데...”
울먹이며 말하던 강은우는 피를 흘리며 소파에 앉아 있는 한서연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연 이모!”
강은우는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모, 왜 다쳤어요? 아파요? 괜찮아요?”
한서연은 미소 지으며 강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은우야. 어서 올라가서 자.”
“안 잘래요! 이모가 다쳤는데 어떻게 자요. 이모가 다 나을 때까지 은우가 옆에 있을래요.”
강은우는 한서연에게 매달리며 고집을 부렸다.
심은지는 엄마인 자신보다 한서연을 더 좋아하는 강은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은우야, 걱정하지 마. 앞으로 며칠은 이모가 우리 집에서 지낼 거야. 그런데 방이 부족해서 은우랑 같이 자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니?”
“정말요?”
아이의 눈에는 기쁨이 묻어났다.
“좋아요! 너무 좋아...”
하지만 곧 입을 막고 심은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엄마. 제 뜻은 그게 아니라...”
‘어떡하지? 엄마는 내가 서연 이모를 좋아하는 걸 싫어하는데.’
예전에 강은우가 한서연과 놀다가 늦게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 심은지가 크게 화를 냈었다.
그날 강우빈은 엄마 앞에서는 서연 이모를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심은지는 낮게 속삭이며 차가워진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다.
아무리 어린이라도 배은망덕이라는 게 뭔지 심은지는 오늘 처음 실감했다.
심은지는 강은우가 태어난 날을 떠올렸다.
이틀간의 난산 끝에 사경을 헤맸고 의사는 산모와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강우빈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아내만 살려달라며 미친 듯이 외쳤다.
그러나 심은지는 울며 애원했다.
아이를 살려 달라고, 자신은 포기해도 좋으니 강우빈의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결국 그녀는 마취도 없이 악착같이 버티며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그 뒤 직장을 포기하고 온 마음을 다해 강은우를 키웠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남편의 외도와 새엄마를 원하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심은지는 이제 너무 힘들었고 뱃속의 아이조차 사실은 낳고 싶지 않았다.
지난주 검진에서 처음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절망으로 가득했고 더는 강우빈을 위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떠나기로 결심하자 희미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강씨 가문의 족쇄 없이 아이와 자신이 자유롭게 살아간다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자 심은지는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심은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강은우는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피로 맺어진 사이였으니 스스로 버림받았음을 직감하는 듯했다.
“으앙!”
한서연은 깜짝 놀라 아이를 꼭 껴안고 달랬다.
“은우야, 울지 마. 이모가 있잖아. 괜찮아.”
한서연은 안쓰러운 눈으로 강은우를 바라보다가 눈가가 촉촉이 젖은 채 억울함을 호소하듯 강우빈을 올려다보았다.
‘보세요. 심은지가 또 아이를 울렸잖아요.’
강우빈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잠시 2층을 올려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