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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꿈도 꾸지 않은 채 단잠을 자고 일어난 심은지는 자신을 위해 아침을 만들려고 일 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계단에 다다르기도 전에 음식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한서연이 이미 가족의 아침을 준비해 놓고 강우빈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주고 있었다. 심은지를 본 한서연은 환히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언니, 일어나셨네요. 어서 와요. 제가 샌드위치를 만들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서연 이모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은데요.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강은우는 방긋 웃으며 말을 덧붙이더니 이내 심은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묻어나 있었다. 강은우는 심은지가 두려우면서도 싫었다. 이전과 달리 언제부터인가 심은지는 낯설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강은우 역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번 강은우가 한서연을 칭찬하면 심은지는 자극받은 듯 아들을 더 잘 챙겼다. 그런 방식으로 강은우는 각종 보충수업에서 빠져서 놀 시간을 얻었다. 심은지는 아들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한때 심은지가 한서연을 질투하고 미워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한서연이 강은우를 챙기는 일은 늘 눈감아 주곤 했다. 강은우는 강씨 가문의 장손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심은지는 시어머니에게서 아이의 교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잔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심은지는 아이가 즐겁게 자라길 바랐고 강은우도 그저 만화책과 게임을 좋아하고 자연에서 뛰어노는 밝은 아이였다. 그러나 강우빈의 아내로서,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인물로서 심은지는 엄격하고 무거운 역할을 떠안아야 했다. 그래서 강은우는 늘 엄마가 너무 엄하다고 아빠에게 불평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은 심은지가 밤마다 아이를 위해 각국의 교육 서적을 탐독하며 강은우에게 가장 알맞은 균형 있는 교육 방도를 찾아 애써왔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는 엄마였지만 한서연이 인턴이던 시절 직접 손수 동화책을 만들고 장난감을 건네주며 강은우와 친해지길 부탁했던 것도 바로 심은지였다. 강은우가 가장 좋아하는 생선튀김도 사실은 심은지가 한서연에게 손수 가르쳐 만든 요리였다. 그렇게 애써 쌓아온 모든 것이 이제는 자신을 찌르는 칼날처럼 돌아왔다. 심은지는 싸늘한 얼굴로 허무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한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심은지의 첫마디에 한서연은 움찔하며 주저주저 대답했다. “이... 이건 어젯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옷방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은 거예요. 언니, 왜 그래요?” ‘왜 그러냐고? 이 집안과 아무 상관없는 여자가 내 원피스를 입고 남편에게 커피를 타 주고 아들한테 아침을 차려주면서 왜 그러냐고?’ 심은지의 기분을 알아챈 강우빈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심은지, 고작 옷 한 벌 가지고 왜 또 그래? 적당히 해. 너한테 블랙카드도 줬잖아. 나가서 사고 싶은 대로 사.” 그 말에 심은지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입덧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인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강우빈, 설마 잊었어? 이 옷은...” 한서연이 입고 있는 옷은 강우빈과 심은지가 함께 처음을 보내고 나서 입었던 옷이었다. 그때의 심은지는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이었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한 번의 술자리에서 회사에 큰 계약을 성사하려는 야심으로 술을 들이켰고 누군가 약을 탔다는 것도 모른 채 회사 대표와 잠자리를 가졌다. 다음 날 아침, 찢긴 옷 때문에 도저히 출근할 수 없었던 심은지는 하는 수 없이 호텔 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날, 얼굴이 붉어진 채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강우빈은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는 곧바로 비서를 시켜 원피스를 사 오게 했으며 그 뒤로 심은지는 그의 비서가 되었다. 지금 한서연이 입고 있는 원피스가 바로 그날 강우빈이 심은지에게 사주었던 원피스였다. 두 사람의 시작을 상기시키는 옷을 다른 여자가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심은지의 속은 역겨움으로 가득 찼다. 강우빈은 그녀의 흔들리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비웃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짙은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 “저 옷이 뭐? 하던 말 마저 해. 심은지, 저 옷이 너한테 그렇게 소중해?” 살벌한 분위기에 한서연이 다급히 뛰어와 심은지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언니, 강 대표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제멋대로 입은 거예요. 강 대표님은 그냥 제가 불쌍해서 그냥 두신 거예요. 언니가 이렇게 마음 쓰실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언니. 당장 갈아입을게요. 화 풀어요, 네?” 심은지는 속이 뒤집혀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니. 네가 입으니 잘 어울리네. 그냥 가져. 이 원피스 외에도 드레스룸에 있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건 다 가져도 돼.” 그리고 고개를 들어 강우빈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한서연, 이 집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이제 전부 네 거야.” “심은지!” 심은지의 말에 강우빈은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렇게까지 서연이를 몰아붙여야 해?” “내가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지금 너희 둘이 나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야.” 띠링. 이때 심은지의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보니 타이머가 눈에 들어왔다. 남은 시간, 열세 날. 이런 식이라면 열세 날도 못 버티고 떠날 것만 같았다. 강우빈은 하루하루 그녀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오늘은 옷이고, 내일은 또 뭘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심은지는 한서연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 ‘향수?’ 은은하게 스쳐 오는, 마치 체향과도 같은 그 향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맡을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오니 강하게 느껴졌다. 원래 향에 민감했던 심은지는 순간 얼굴이 새파래졌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는 노트에 적어 놓았던 메모가 스쳐 지나갔다. [여자의 모든 향수를 다 싫어함.] ‘그래, 강우빈. 이제 알겠네. 한서연 앞이라면 네 모든 원칙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였구나.’ 심은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심은지는 더 이상 카운트다운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부모가 기다리고 있었고,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친구들마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강우빈이 뭐라고 내가 이 집에서 저딴 여자 때문에 십 년을 짓밟히고 모욕을 당해야 하는 건데?’ “우리가 몰아붙인다고? 그럼 꺼져!” 강우빈은 차가운 눈빛으로 심은지를 바라보며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집 안에서 하루 종일 얼굴 찌푸린 채 모두가 너한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지 마. 심은지, 이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 감정이 격해진 심은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기 전에 심은지는 갑자기 숨이 꽉 막히는 듯했고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아픔에 목덜미를 움켜쥔 채 충격에 가득 찬 눈으로 한서연을 바라보았다. ‘향수? 꽃향기?’ 심은지는 처연하게 웃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강우빈, 날 죽이고 싶으면 그냥 말해.” 그러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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