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비밀 결혼 3년 차, 마침내 아이를 가진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남편 이시헌에게 전하고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야, 유정이가 이미 로즈파를 넘겨받았어. 이제 임다희랑은 정리할 생각이야. 아직 질리지 않았다면 며칠간은 걔 네가 가져.”
곧 남편과 닮았지만 훨씬 경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좋지. 형은 참 한결같이 통이 크네. 유정이를 지키기 위해서 아내까지 동생한테 넘겨주다니... 나중에 자기가 몇 년 동안 같은 침대에 누운 사람이 남편이 아니라 실은 남편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걔 멘탈붕괴 오지 않을까?”
남편의 목소리는 차갑고 혐오에 가까웠다.
“가짜 증명서 한 장에 속아 넘어간 멍청이가 내 아내가 될 자격이나 있나? 게다가 하도 둔해서 3년이나 눈치 못 챘는데 앞으로도 알 리가 없지.”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운명이라 믿었던 내 사랑은 남편과 그의 쌍둥이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치밀하게 꾸며낸 잔인한 게임에 불과했던 것이다.
...
집 안의 대화는 계속됐다. 이시우의 목소리는 가볍고 노골적인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래, 형. 그럼 며칠 동안은 제대로 즐겨야겠다. 형 마누라, 몸매도 최고고 침대에서도 순하잖아. 형 유정이랑 결혼하면 걔는 내가 갖고 놀게 집에 가둬줘.”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시헌의 차갑고 혐오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혹시라도 난동 부리다 유정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렇긴 하지. 지 엄마 닮아서 뻔뻔한 여자니까. 애초에 첩의 자식인 주제에 유정이랑 후계 자리까지 다투려 했잖아. 형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 유정이라는 걸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형제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혐오가 가득했고 나는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뛰어들어 따질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로즈파는 원래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세운 조직이라는 것이다.
조직이 자리를 잡고 세력을 키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첫사랑과의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는 나보다 겨우 보름 먼저 태어났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와 혼외자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깊은 우울감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혼을 택하며 그 후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첫사랑과 재혼했다.
나의 가정은 그날로 완전히 무너졌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죄책감이 들었는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가장 사랑하는 건 나와 어머니라고 말하며 언젠가 조직의 후계 자리를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애써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결국 첫사랑의 말에 흔들려 서서히 의붓언니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의붓언니가 밖에서 나를 ‘첩의 자식’이라 모함하도록 방치했고 어머니의 존재를 공개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아직 로즈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에 모든 걸 참고 견뎠다. 권력을 손에 넣으면 모든 게 바뀔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3년 전, 의붓언니는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다리 위에서 떨어졌고 그 책임을 나에게 떠넘겼다. 분노한 아버지는 조직에서의 모든 권한을 회수하고 나를 집에서 쫓아냈다.
아버지가 내보낸 신호와 의붓언니를 향한 노골적인 편애 앞에서 결국 로즈파에서 수년간 쌓아 올린 내 위상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모두가 내가 임유정을 질투해 악랄한 수단을 썼다고 손가락질했다.
마침 외할아버지마저 중태로 쓰러져 의식이 없던 때라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나는 쓰레기처럼 아버지에게 버려졌다.
비를 맞으며 쓰레기더미 속에 웅크린, 마치 노숙자 같은 내 모습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이시헌이 나타나서는 비에 젖어 떨고 있던 나를 안아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며 여기저기 퍼져나간 소문을 정리해 주고 내 위에 보호막처럼 서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씨 가문 며느리의 상징인 반지를 내 손에 끼워 주었다.
“다희야, 밖은 피비린내 나는 일들뿐이라 너무 위험해. 너 같은 장미가 머물 곳은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시집와. 내가 네 바람막이가 되어 줄게. 어때?”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악명 높은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신고를 한 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고 혼인신고서를 손에 쥐자마자 나는 들뜬 마음으로 결혼식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희야, 아직 우리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 결혼식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리고 부모님이 동의하시기 전까지는 우리 관계도 당분간 공개할 수 없어. 미안해. 널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네가 손가락질받는 걸 원치 않아서 그래. 언젠가는 당당하게 이씨 가문에 시집오게 해 주고 싶어.”
이씨 가문이 나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마음이 쓰렸지만 더는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이씨 가문에서 요구하는 차기 안주인은 ‘출신이 깨끗해야 한다’며 나를 분쟁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스스로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았고 나아가 가문과의 인연까지 끊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그의 신부가 되었다.
로즈파의 후계자였던 나는, 어느새 이시헌만 바라보는 전업주부가 되어 총을 쥐던 손에는 집안일로 생긴 굳은살이 가득했다.
결혼 후, 이시헌은 달라졌다.
낮에는 언제나 차갑게 굴며 거리를 두더니 밤이 되면 집요할 정도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를 사랑했기에 나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변명했다.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그가 밤마다 그렇게 집착하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 ‘남편’이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혼인신고서가 그저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동안 받았던 모든 사랑은 단 한 여자를 위해 그들이 짜 맞춘 덫이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때 집 안에서 이시우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앞으로 임다희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시헌은 거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유정이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내고 사람 붙여서 돌보게 할 거야. 남은 생은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줘야지. 다만... 다시는 나랑 유정이 앞에 나타나게 할 수는 없어.”
그 짧은 한마디로 내 남은 인생은 결정되어 버렸다.
이시헌에게 나는 아무렇게나 버려도 되는 장난감 같은 존재일 뿐이었던 거다.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손에 쥔 임신확인서를 꽉 쥔 채,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변이 전부 흐릿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임유정이 떨어졌던 바로 그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다리 난간 쪽으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 가방 속 휴대폰이 울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다희야, 외할아버지 깼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외할아버지의 자애롭고도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할아버지 없는 동안, 누가 우리 복덩이를 괴롭힌 거야?”
나는 휴대폰을 끌어안은 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외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다들 저를 괴롭혀요.”
그러자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한층 더 다정해졌다.
“울지 마라, 다희야. 다음 주면 할아버지가 사람 보낼게. 집으로 돌아와.”
나는 온 힘을 짜내 겨우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