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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전화를 끊고 나는 무감각한 상태로 이시헌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3년 동안 이곳에는 내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때문에 떠날 거라면 그 흔적부터 말끔히 지워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이시헌의 옷을 입고 있었고 말투까지도 흉내 내며 다정하게 물었다. “다희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피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에 이시헌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볍고 희롱하는 듯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시헌이 아니라 이시헌의 동생, 이시우였다. 조금 전 들었던 그들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다시 울렸다. ‘아직 질리지 않았다면 며칠간은 걔 네가 가져.’ 이시헌은 정말로 나를 물건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있었다. 형제 둘이 짜고 나를 철저히 바보로 만든 것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쓰라림과 억울함을 눌러 삼킨 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울었던 탓에 목소리는 거칠게 잠겨 있었다. “일찍 들어와서 혹시 알면 안 될 걸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시우는 순간 표정이 굳더니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다희야,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숨길 일이 뭐가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목소리도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검사 결과가 안 좋았어?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네 곁에 있을게.” 그 말과 동시에 이시우의 손은 익숙하게 내 옷 안으로 들어와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말에 감동했을 것이다.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가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증명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달리 역겨운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곧 나는 힘껏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가 감기라고 했어. 옮기기 싫으니까 며칠은 따로 자자.”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한밤중, 잠결에 누군가가 나를 안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체취는 익숙했다. 지난 3년 동안 늘 내 곁에서 잠들던 바로 그 사람의 냄새였다. 처음에는 그저 안고만 있었지만 이내 그의 손이 천천히 몸 위를 더듬었고 숨결이 귀 옆에 닿았다.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 옷을 풀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낮게 흘러나온 이름이 들렸다. “유정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시우가 이 터무니없는 계획에 가담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역시 임유정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형제가 나를 한 여자 대신 세운 대체품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리고 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차갑게 말했다. “아프다고 했잖아. 하기 싫다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 계속 여기서 잘 거면 내가 손님방으로 가서 갈게.” 이시우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흐릿하던 눈빛이 또렷해지며 잠시 분노가 스쳤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가라앉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한숨을 쉬며 내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래, 아픈데 뭐라 안 할게. 내가 손님방으로 갈 테니까 넌 여기서 자.” 그가 방을 나간 뒤, 나는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물을 마시러 나가려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밖에서 이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오늘 밤 다희가 좀 이상했어. 혹시 뭘 눈치챈 건 아니겠지?” 곧이어 이시헌의 냉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만약 알아챘다면 지하실에 가둬. 다음 주가 유정이의 생일이잖아. 그날 우리가 약혼했다고 알릴 건데 임다희가 이 일을 망치게 둘 수는 없어.” 이시우가 머뭇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오늘 병원에 다녀온 것 같던데, 혹시...” 이시헌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와 이시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걔 원래 불쌍한 척 잘하잖아. 왜, 너 설마 3년이나 같이 자다 보니까 정 붙은 거야? 그래서 마음이 약해진 거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어떻게 그런 역겨운 여자를 좋아해? 침대에서 얌전하니까 건드려 준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손도 안 댔어!” 마치 나와 조금이라도 엮일까 두려운 사람처럼, 이시우의 목소리는 조급했고 노골적인 혐오가 섞여 있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애썼다. 3년. 그들에게 그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고 나는 그저 중요하지 않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은 막 병원에서 돌아온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으며 오직 임유정이 기분 상해하지 않을지, 그것만을 걱정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은 이미 얼굴에 말라붙었고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결혼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밤을 새웠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왔을 때에서야 굳어 버린 몸을 겨우 움직였다. 그러고는 무감각한 상태로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류, 옷...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캐리어에 넣었으나 이시헌이 그동안 사 준 것들은 단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그러다 그 사진을 발견했을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혼인신고를 한 것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이시헌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혼인신고를 하던 날, 그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귀찮아하고 혐오스러워했다는 것을. 나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드디어 결혼한다는 기쁨에만 빠져 있었다. 그가 당시 직원에게 돈을 쥐여 주고 가짜 혼인신고서를 만들게 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래서였구나.’ 혼인신고 후에도 그는 온갖 핑계를 대며 결혼식을 미뤘다. 늘 조용히 지내라며 밖에서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애초에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던 거야.’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이시헌이 밖에서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늘 그랬듯 다정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누가 내 보물을 이렇게 만들어 놨어? 말해 봐. 내가 가서 혼내 줄게.”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다정함으로 악의를 감싸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길들여 순한 고양이로 만들어 놓고는 다른 여자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계속 짐을 정리했다. 그제야 캐리어를 발견한 이시헌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내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다희야, 이게 무슨 짓이야?” 정말 나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진실한 표정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아 애써 비웃는 기색을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정리하고 싶어졌어.” 이시헌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 손에 들린 혼인신고서를 보는 순간, 그의 눈에 스쳐 간 것은 분명 경멸이었다. “이런 건 도우미들이나 하는 일인데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아, 맞다. 여기 사인 하나만 해줘.” 이렇게 말하며 이시헌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단 한 번 훑어본 순간,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로즈파 후계자 권리를 영구적으로 포기한다는 합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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