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신지은이 하모니아를 나서자마자 휴대폰이 한 번 진동했다.
[너 어디 갔어?]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역시 강재민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의사 말로는 네가 나한테 피 400mL를 헌혈했다던데... 네 몸으로 어떻게 버텼어?]
신지은은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점심 사러 나왔어. 금방 돌아갈게.]
그녀는 아직 강재민에게 청력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자신이 듣지 못한다고 믿는 상황에서 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신지은은 근처 도시락 가게에 들어가 가장 싼 도시락 두 개를 주문했다.
한편, 강재민은 병실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있다가 신지은이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예전과 다르지 않은 걱정과 애정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신지은은 고개를 숙인 채 도시락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향이 있었다.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 냄새, 그건 안이서가 즐겨 쓰던 향수였다.
심지어 향수 한 병의 가격은 두 사람의 두 달 치 생활비와 맞먹는 브랜드였다.
강재민은 휴대전화를 켜 이미 입력해 둔 글자를 신지은에게 보여 주었다.
[보청기 망가진 건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회사로 빨리 복귀해서 일하고 다음 달 월급 나오면 다시 사면 돼.]
예전의 신지은이었다면 눈시울을 붉히며 수어로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 마.]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조용히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9개월간 청력을 잃은 터라 언어 기능은 많이 퇴화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 사실은 오히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이유가 되어줬다.
두 사람이 먹는 도시락의 밥은 딱딱했고 볶은 채소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사실 이건 임대 아파트에서 살면서 먹던 수많은 밥들과 다를 바 없었다.
신지은은 이제 알았다.
강재민이 말하던 희생은 사랑이 아니라 속죄와 책임감이었다는 것을.
너무 값이 싸서 감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 그래서 신지은은 자신이 그에게 감정을 소모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꼈다.
일주일 뒤, 강재민은 몸이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퇴원을 고집했다.
[빨리 회사로 복귀해야 해. 너무 오래 비우면 내 일자리는 없어질 수도 있어.]
신지은은 별다른 말 없이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강재민을 속인 채 시간을 내 하모니아에서 연습을 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강재민의 짐을 정리해 주다 외투를 건네는 순간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국립극장 VIP석, 오늘 저녁 8시. 안이서 연주회.]
이건 떨어진 카드에 적혀있는 글씨였다.
‘이래서 상처도 다 낫지 않았는데 퇴원을 서둘렀구나.’
신지은의 눈빛이 조금 서늘해졌지만 강재민은 눈치채지 못한 채 몸을 굽혀 티켓을 주웠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서가 준 표야. 너한테는 소리가 너무 자극적일까 봐 나 혼자 가려고 했어.]
신지은은 강재민을 똑바로 바라본 뒤, 그의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이런 글을 입력했다.
[나도 가고 싶어.]
강재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은은 청력을 잃은 뒤에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나마 가끔 나갈 때도 대부분 그가 억지로 데리고 나갔을 뿐이었다.
밤, 콘서트홀은 눈부시게 밝았다.
신지은은 강재민 옆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무대 위의 안이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리고 중간에는 짧지만 화려한 독주 파트도 있었다.
얼마 후, 관객석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국제 대회 우승한 사람이 바로 안이서잖아.”
“원래는 더 잘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기권했다던데?”
“신... 뭐였지? 성이 신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이런 기회는 한 번 놓치면 평생 후회될 거야.”
귀에 선명히 들리는 말에 신지은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내 연주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강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장미 꽃다발을 안고 무대로 올라갔다.
스포트라이트가 강재민을 비추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꽃을 안이서에게 건넸다.
그러자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직접 꽃을 전해 주시다니... 두 분 관계가 남다르신가 보네요?”
안이서는 고개를 숙이며 웃기만 했고 관객석에서는 호의적인 웃음소리가 퍼졌다.
강재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신지은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텅 빈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제야 그는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려 사회자를 보며 웃었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신지은은 심장이 무언가에 의해 뻥 뚫린 듯 허전해졌다.
곧, 사람들 앞에서 강재민이 보인 태도를 보며 그녀는 문득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도심 외곽의 작은 교회에서 치른 결혼식에는 하객도, 웨딩드레스도 없었다.
그곳에는 두 사람과 교회 목사, 단 세 사람뿐이었다.
서약을 마친 뒤 강재민은 신지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서툰 수어로 말했었다.
[내 생에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
한 번으로 부족할까 봐 다시 한번 반복했고 신지은이 울며 강재민의 손을 잡을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강재민이 평생 자신만을 바라볼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믿음을 가차 없이 짓밟았고 신지은이 진심으로 믿었던 서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안이서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무대에서 내려와 강재민의 팔짱을 꼈다.
“뒤풀이도 할 거야. 넌 꼭 와야 해!”
강재민은 신지은을 향해 수어로 물었다.
[같이 갈래?]
신지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강재민은 이해했다는 듯 그녀를 위해 택시를 불러줬다.
얼마 후, 택시가 출발할 때 신지은은 백미러를 통해 안이서가 강재민에게 딱 달라붙어 뭔가를 말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강재민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무도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신지은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듯 아팠지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은 오디션이 있으니 컨디션 좋아야 돼. 이런 걸로 망치면 안 되잖아.’
달리는 차 안에서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