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5화

이 대표는 안이서의 이력서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안이서 씨의 성과가 화려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관객을 붙잡는 건 결국 실력이죠.” 짧은 한마디에 안이서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이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그러자 옆에 있던 조수희가 대답했다. “저희는 여기서 실제로 쌓아 온 내공을 봐요. 이름값은 안 본다는 말이죠.” 그녀는 옆에 있는 가야금을 가리켰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앉아서 한 곡 쳐 보세요.” 안이서의 잠깐 망설이더니 곧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치면 되죠.” 그녀는 거문고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까이 다가가 앉아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쌍의 피크를 꺼냈다. 신지은은 단번에 알아봤다. 안이서가 꺼낸 피크가 바로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물건이라는걸. 이내 그녀는 피크를 끼고 연주를 시작했고 초반 몇 음은 안정적이었다. 기본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섬세함이 필요한 구간에 들어서자 어색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몇 개의 음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들었고 리듬의 강약 조절은 명백히 흐트러졌다. 마치 신지은의 연주를 흉내 낸 듯했지만 정작 핵심은 전혀 잡지 못한 소리였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음정이 틀리고 소리를 먹기까지 했다. 이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수희를 바라봤다. 그러자 조수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국제 대회에서 상 하나 따고 이름 좀 알려졌다고 판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너무 많이 봤죠. 실력은 소리에서 바로 드러나요. 요령으로는 저희가 하는 일을 못 하거든요.” 안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피크를 거칠게 벗어 소리가 날 정도로 폭력적이게 케이스 안으로 던졌다. 그녀는 가방을 움켜쥔 채 독이 잔뜩 오른 눈빛으로 신지은을 노려봤다. 이윽고 문이 세게 닫히자 이 대표는 신지은의 계약서를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비록 종이는 가벼웠지만 신지은은 종이의 무게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펜을 들어 서명란에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솔직히 다 쓰고 나서도 그녀는 살짝 멍해졌다. 신지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정식으로 미래에 대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녀는 저녁이 될 때까지 하모니아에서 연습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침실 쪽에서 안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회사 일도 바쁘고 지은 씨는 몸도 안 좋아서 집이 이렇게 엉망인데 정리하는 사람도 없어서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파.” 현관에 선 신지은의 시야에 반쯤 닫히지 않은 침실 문 사이로 따뜻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안이서그 초라하고 페인트가 벗겨진 침대 옆 탁자 위에 정교한 향수병 하나를 올려두고 있었다. 그리고 강재민의 낡은 셔츠 한 벌은 정성스럽게 접혀 눈에 확 띄는 안이서의 명품 가방 옆에 놓여 있었다. 강재민은 값싸 보이는 플라스틱 수도관 부품을 뜯고 있었다. 며칠째 수도꼭지가 고장 났지만 수리 기사를 부르는 돈이 아까워 인터넷으로 부품을 주문하느라 이틀이나 걸렸다. 부엌으로 가던 중 그는 신지은을 보고는 먼저 쉬라고 손짓했다. 곧 부엌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신지은은 그쪽으로 갔다. 강재민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수리를 하고 있었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팔에는 힘이 들어가 선이 도드라졌고 얼굴에는 물방울이 조금 튀어 있었다. 안이서는 싱크대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채 좁은 집안을 훑어보며 물었다. “재민아, 이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몸을 돌리기도 힘들잖아.” 강재민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하던 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창문을 통해 한강은 살짝 보여. 지은이가 한강 보는 걸 좋아하거든.” 안이서는 노골적으로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청각장애인이 뭘 그렇게 따져? 강이 보이면 뭐 해?” 강재민은 그 말에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지은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안이서의 날 선 말들은 마치 유리 너머에서 날아오는 것 같았다. 들리긴 했지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하는 것, 신지은에게 있어 그 소리는 그저 시끄러울 뿐이었다. 얼마 후, 수도꼭지가 수리된 듯 강재민은 연결부를 조이고 물을 틀어 확인했다. 다행히 물은 더 이상 새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도구를 정리했다. 그때, 안이서가 쪼그려 앉은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아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언제까지 이 짐 덩이를 안고 살 거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강재민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우린 작년부터 이미 사귀기로 했잖아. 솔직히 말해 그게...” 안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재민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해.” ‘작년?’ 신지은이 멍해 있는 사이 안이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필경 안이서는 그녀가 이제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강재민은 몰랐다. 그래서 안이서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무서워? 어차피 지은 씨는 못 듣잖아. 너 원래 그 공연만 성공하면 헤어지자고 말할 생각이었잖아? 네가 그랬잖아. 지은 씨 얼굴 이제 질린다고.” 잠시 멈칫하던 안이서는 신지은의 표정을 살피며 강재민에게 더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내가 지은 씨 귀를 먹게 하지 않았으면 넌 일이 커질까 봐 겁나서 나랑 관련된 거 숨기고 여기 남아서 간병할 이유도 없었겠지?” 강재민은 바로 안이서를 밀어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건 부정이 아니라 묵인이었다. 신지은은 그 모습에 온몸의 피가 서서히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끔찍한 ‘사고’ 전부터 강재민이 이미 이별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결국 작년부터 그의 마음은 떠나 있었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사랑은 신지은 혼자 붙잡고 있던 것이었다. 곧, 그녀는 3년 전을 떠올렸다. 하얀 셔츠를 입은 강재민이 매일 연습실 문 앞을 서성이며 마주쳐도 말도 못 걸고 수줍게 웃기만 하던 모습. 그리고 매일 아침밥을 가져다주며 꽃 한 송이를 건네던 소년. ‘마침내 용기를 내 고백하던 그 소년이 언제 이렇게 낯선 사람이 되었을까?’ 신지은이 고개를 들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재민과 안이서가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침실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부엌에서는 안이서의 웃음소리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강재민의 낮은 대답이 들려왔다. 신지은은 벽과 마주한 채 누워있었지만 그날 밤은 오래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