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강재민은 신지은의 표정이 굳어 버린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계속 타자를 했다.
[지난번에 이서가 집에 왔을 때, 이 상자를 보고 이런 재질의 피크가 마음에 든다고 했어. 지금 넌 들을 수도 없고 가야금 연주도 못 하잖아. 그러니까 이서가 쓰는 게 더 낫지. 물건도 쓰임이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신지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짓이 거칠어졌다.
[그건 내 거야!]
강재민은 한숨을 내쉬며 마치 철없는 아이를 달래듯 수어로 말했다.
[귀가 다 나으면 내가 더 좋은 걸로 하나 맞춰 줄게.]
타자를 하고 난 뒤 그는 고개를 들어 신지은을 바라봤다.
강재민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했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타이르듯 웃고 있었다.
신지은은 그들이 처음 그 낡은 임대주택으로 이사 왔던 시절을 떠올렸다.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몸에 걸친 값나가는 것들을 전부 팔아치웠지만 강재민은 끝까지 그녀가 가장 아끼던 거문고는 남겨 두자고 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시도한 끝에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절망 속에서 신지은은 거문고를 부숴 버렸다.
악기 몸통은 반으로 갈라졌고 끊어진 현이 튕겨 올라 손등에 선혈을 남겼다.
부서진 나뭇더미 속에 주저앉은 채 신지은은 자신도 함께 폐기물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때 강재민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상처를 살폈다.
그는 부서진 거문고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비록 신지은은 들을 수 없었지만 강재민의 호흡이 거친 건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뒤 월급을 받은 날, 강재민은 낡은 거문고 한 대를 메고 들어왔다.
색이 바래 음정도 맞지 않았지만 그는 두 시간을 들여 조율한 뒤 신지은을 거문고 앞에 앉혔다.
[한번 쳐 봐. 손가락은 감각을 기억할 수 있어.]
그날 신지은은 울어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정말로 연주를 시작했다.
뚝뚝 끊기고 음정도 엉망이었지만 현이 울리며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그건 그녀가 세상과 이어진 마지막 끈이었다.
그런데 지금, 강재민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피크를 안이서에게 아무렇지 않게 건네며 마치 쓰임이 없는 물건처럼 처리해 버렸다.
신지은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본 뒤, 빈 상자를 내려놓고 소파 위에 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강재민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
신지은은 손을 뿌리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나갔다.
쾅!
문이 닫히자 숨 막히던 공간이 완전히 차단됐다.
한편, 하모니아에서는 조수희가 신지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사정을 들은 조수희는 연습용으로 쓰는 평범한 피크 한 세트를 건네줬다.
“일단 이걸로 해 봐요. 응급용으로는 충분해요.”
신지은은 그걸 끼고 연습실의 거문고 앞에 앉았다.
현을 튕기자 음색은 탁했고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도 둔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연주부터 다시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쯤, 조수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뒤에는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신지은 씨, 이번 투어 총괄 책임자 이 대표님이에요.”
조수희의 소개가 끝나자 이 대표는 신지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제가 들은 바로는 회복이 꽤 됐다던데 한 곡만 들어볼까요?”
신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른 건 고난도의 클래식 곡이었다.
초고속 트레몰로와 정확한 힘 조절이 필수인 곡.
이런 곡은 손가락이 쉽게 미끄러지고 음도 가벼워지기 때문에 일반 연습용 피크를 사용하는 건 불리했다.
하지만 신지은은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빗방울처럼 촘촘한 트레몰로 강약 전환은 깔끔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내 연주가 끝나자 이 대표가 박수를 쳤다.
“대단하네요. 반년 넘게 소리를 못 들었는데 이 실력을 유지하다니.”
그는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럼 확정하죠. 2주 뒤 출발, 첫 공연지는 싱가포르입니다. 보수는 한 회당 정산을 해드릴 겁니다. 금액은... 이겁니다.”
그가 말한 금액은 신지은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신지은이 서명하려는 순간 연습실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안이서가 하이힐을 신고 들어왔다.
손질한 웨이브 머리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했고 옷은 갓 나온 신상 세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신지은을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곧 프로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투어 거문고 연주자 자리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어서요. 저도 한번 오디션 보고 싶어요.”
안이서의 말에 조수희가 먼저 대답했다.
“이미 신지은 씨가 하기로 확정됐어요.”
그녀의 시선은 신지은이 끼고 있는 피크로 향하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제가 알기로 신지은 씨는 청력 손상이 심해서 반년 넘게 공개 연주를 안 했던 걸로 아는데요. 투어 강도가 꽤 센데 괜찮을까요?”
신지은은 그 말에 담담하게 입을 뗐다.
“괜찮은지는 방금 이미 들으셨잖아요.”
안이서는 몇 초간 멍해졌다.
“이제... 소리가 들리세요?”
신지은은 피크를 상자에 넣으며 되물었다.
“실망했어요? 이서 씨가 던진 폭죽이 제 귀를 완전히 먹게 만들지는 못했네요.”
연습실 안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 대표와 조수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이서의 안색은 잠시 창백해졌다가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왔다.
그녀는 신지은에게 가까이 다가가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들렸겠네요. 어젯밤 저랑 재민이가 거실에서 낸 소리도.”
그녀의 말투는 노골적인 도발이었지만 신지은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네. 들었죠. 그런데 보통은 외도를 자랑처럼 꺼내지 않아요. 안이서 씨, 취향이 꽤 독특하시네요?”
안이서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싱긋 웃으며 이 대표를 향해 말했다.
“이 대표님, 다시 한번 고려해 주셨으면 해요. 제 인지도는 신지은 씨와 비교가 안 됩니다. 제가 거문고 파트를 맡으면 이번 투어 노출도랑 좌석 점유율이 두 배는 오를 거예요.”
그녀는 가방에서 두툼한 자료를 꺼내 이 대표 앞에 내밀었다.
“최근 2년간 공연 이력, 언론 평가, 그리고 지난주에 체결한 광고 계약서예요. 저희 회사에서 전면 홍보도 지원할 수 있어요. 동시 진행도 가능하고요.”
이 대표는 자료를 넘길수록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신지은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꽉 쥔 주먹 탓에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솔직히 지금 그녀에겐 저런 것들이 없다.
긴 공백기 때문에 공연도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선 적도 없고, 제대로 된 팀도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두 손과 방금 빌려 맞지 않는 피크뿐이다.
곧, 안이서는 신지은을 바라보며 마치 승리자가 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