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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골수 기증

새벽 두 시. 신해정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옆쪽 침대 매트리스가 살짝 내려앉는 감각이 전해졌다. 눈을 뜰 틈도 없이 차가운 기운이 먼저 몸을 감싸 왔다. 은은한 알코올 냄새에, 희미하게 섞인 쌉싸름한 약 향. 박준혁에게서만 나는 익숙한 냄새였다. 신해정은 잔뜩 긴장했던 신경이 본능처럼 풀리며, 몽롱한 상태로 그의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목소리에는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갑자기 응급 수술이 하나 더 생겼어.” 박준혁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치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 같은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신해정은 익숙한 온기에 깊이 잠겨 마음이 말랑해졌고, 다시 잠이 쏟아졌다. 막 다시 꿈속으로 빠지려던 순간,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해정아, 채은이 상태가 안 좋아.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골수 한 번만 더 기증해 줘.” 유채은은 박준혁이 맡고 있는 백혈병 환자였다. RH식 혈액형으로 극히 특수한 경우였다. 무려 2년 동안 서울 전역을 뒤져도 맞는 공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오직 신해정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었다. 이전의 기증도 모두 익명으로 진행됐다. 자신의 작은 희생으로 젊은 생명을 이어 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치의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환자 문제로 마음고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이었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해정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아직 평평한 배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그리고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말했다. “준혁아,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신해정은 깜짝 놀라 멍하니 고개를 들었고, 박준혁의 눈과 마주쳤다. 조금 전의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늘 다정함을 머금던 그의 눈에는 차갑고 날 선 빛만이 남아 있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라 신해정은 순간 말을 잃었다. 대답이 없자 박준혁의 말투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해정아, 지금은 애처럼 떼쓸 때가 아니야. 채은이는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라 수술 준비도 다 끝났어. 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네가 질 수 있겠어?” 그의 추궁에 신해정의 가슴속에서는 억울함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며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손끝을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누군가를 꼭 구해야 할 의무는 없어. 기증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그런데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해?” 박준혁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서서히 식어 갔고, 끝내 낯설 만큼 차가운 실망으로 변했다. “신해정, 네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냉정할 줄은 몰랐어.”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손으로 미간을 세게 눌렀다. “채은이 수술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어. 내가 주치의인 이상 문제가 생기면 내 명성도, 앞으로의 커리어도 전부 영향을 받아. 정말 네 고집 때문에 내 미래를 망치겠다는 거야?” 침실은 숨 막히도록 고요해졌고, 두 사람의 억눌린 숨소리만 남았다. 몇 초 뒤, 박준혁이 갑자기 손을 들어 따뜻하고 건조한 손바닥으로 신해정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목소리도 한결 누그러졌다. “미안해, 해정아. 오늘 너무 피곤해서 언성을 높였어. 일부러 화낸 건 아니야. 이번이 정말 마지막 골수 기증이야, 응?” 그는 낮게 달래듯 말하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선을 천천히 문질렀다.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줘.” 신해정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안에 희미한 피 맛이 퍼질 때까지 말이다. 쌉싸름한 감정이 혀끝에서 가슴 깊숙이 번져 갔고, 끝내 말 없는 타협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다음 날 아침, 신해정은 박준혁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박준혁은 회진과 수술 준비로 분주해 간단히 간호사에게 검사를 맡기고는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신해정은 말없이 기증 전 검사를 하나하나 따라갔다. 막 채혈을 마친 순간 아랫배에 날카로운 통증이 찔러 오듯 스쳤다. 그녀는 배를 감싸 쥔 채 창백한 얼굴로 복도 끝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자마자,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젊은 간호사 두 명의 대화가 들려왔다.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연민이 묻어 있었다. “아까 박 교수님 사모님을 봤어요. 또 골수 기증하러 온 것 같던데.” “또요? 벌써 2년째잖아요. 솔직히 좀 불쌍해 보이긴 해요.” ‘불쌍하다고?’ 신해정은 막 칸 문을 열려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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