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3년 전 나는 위암 진단서를 움켜쥔 채 눈이 새빨개진 고지오를 웃으며 달랬다.
“이 정도 암쯤이야, 금방 이겨낼 수 있어.”
하지만 고지오는 오열하며 나를 꽉 껴안았고, 나는 그 힘에 뼈마디마저 아팠다.
“재이야, 약속해줘. 꼭 무사해야 해. 건강하게 돌아와서 나랑 결혼해야 해.”
살기 위해 나는 거의 위장 전체를 잘라냈다. 매일 나를 기다리는 건 수많은 약과 끝없는 항암 치료뿐이었다.
3년 후 나는 마침내 완치되어 다시 고지오 곁으로 돌아왔다.
환영회 자리에서 그의 ‘여자 형제’라 불리는 유민아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재이야,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지오는 너를 위해서 한결같이 몸을 지켰어. 매일 밤 내가 지오의 침대에서 너 대신 지켜봤다니까. 맹세하건대 이불 속에 다른 여자는 없었어.”
“작은 호두 두 개에 내가 직접 ‘접근 금지’라고 문신까지 새겼어.”
떠들썩하던 룸 안이 갑자기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애써 심장을 짓누르는 미세한 통증을 무시한 채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럼 난 너한테 ‘최고의 침대 파트너상’이라도 줘야 하나?”
...
유민아는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탁하고 술잔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그게 무슨 뜻이야? 쳇, 암에 걸린 게 무슨 대수야? 농담 하나에 삐딱하게 받아치고 말이야.”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고지오의 형제들이 감히 나에게 대드는 거지?’
나는 말 없이 유민아를 지켜봤다.
‘보아하니 지난 3년 동안 지오가 유민아를 잘 대해준 모양이야.’
주변 사람들이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분위기를 수습하려 들었다.
“형수님, 민아한테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저희 눈엔 걔 그냥 남자예요.”
“맞아요. 형수님, 민아는 원래 농담을 심하게 하는 애예요. 민아랑 지오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 저희가 다 보증해요.”
“민아야, 어서 형수님한테 사과드려. 형수님 기분 거스르면 너 앞으로 피곤할 거야.”
유민아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사과해야 하는데?”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유민아 편을 들며 그녀를 변호했다. 마치 내가 흉악한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3년 세월이 흐르니 나는 더는 예전의 그 폭발적인 성격을 가진 아가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심씨 가문의 아가씨인 이상, 그녀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나는 어린 계집애의 몇 마디 말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떠난 3년 동안 고지오 곁에 누가 있었는지도 개의치 않는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나는 고지오를 돌아봤다.
3년 전이었으면 이런 말을 들은 고지오는 날 보호하기 위해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났을 텐데.
하지만 지금껏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고지오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 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마치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민아, 재이한테 사과해.”
겉으로는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몸은 유민아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고지오는 내 손을 가볍게 잡고 토닥였다.
“그냥 농담 좋아하는 어린애일 뿐이야. 넌 민아를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다음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3일 줄 테니 이 일 처리해.”
잠시 멈칫하다가 고지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직접 나서게 하지 마.”
아마도 고지오가 예전처럼 첫 순간에 나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고지오가 몸 뒤에 숨긴 그 ‘여자 형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막 문을 나서려던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지오야, 형수님은 만만한 분이 아닌데 민아가...”
고지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아. 내가 보호하고 있잖아. 게다가 작년에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후로 이제 재이는 고씨 가문을 위협할 한 실력도 없어졌어.”
나도 손톱이 손바닥에 깊숙이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겨우 3년인데 벌써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나 심재이는 지금까지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었어. 내 것이 아니더라도 억지로 내 가방에 쑤셔 넣었던 나야. 네가 나를 3년 기다렸으니 그럼 나도 너한테 3일 시간을 줄게.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게다가 심씨 가문은 지금까지 부모님 덕에 유지된 것이 아니다.
내 짐은 이미 집사가 고지오의 빌라로 옮겨두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직접 가서 짐을 챙겨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집 문을 연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