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신재영은 서울에서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가정부가 실수로 레드와인을 30초 더 늦게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수십만 달러짜리 와인을 모조리 하수구에 쏟아버렸다.
과거의 협력 파트너가 단 1분 늦었을 때도 그는 수백억 원대에 달하는 비즈니스 협력을 망설임 없이 취소했다.
아내 강이설의 외할머니가 임종을 맞았을 때조차 그는 일정표대로 7시 30분에 뉴스를 끝까지 보고 나서야 병원으로 향하겠다고 했다.
“신재영 씨, 외할머니는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에요. 마지막 소원이 당신을 한 번만 보는 거였다고요!”
강이설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을 한 채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우리 외할머니 뵈러 가면 안 돼요?!”
그녀의 말에 신재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아직 3분 남았어. 나한테 일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내 일정을 바꾸고 싶었으면 더 일찍 나한테 말했어야지.”
그 말은 강이설의 귀에 뾰족한 바늘처럼 꽂혔다.
정략결혼한 지 3년이 되었건마는 신재영은 언제나 이렇듯 냉정하고 무자비했으며 시간에 대한 집착은 거의 병적이라 할 정도였다.
3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동안 강이설이 초조한 마음으로 신재영과 차에 오를 즈음 병원에서는 이미 쉰 통이 넘는 전화가 와 있었다.
“강이설 씨! 이영순 여사님이 곧 한계입니다, 서두르세요!”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더 빨리 가 달라고 재촉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뒤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하자마자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외할머니는 그녀를 가장 걱정하고 가장 사랑해 준 사람이었다.
외할머니의 유언은 신재영을 한 번만 보는 것이었고 어쩌면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강이설은 외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차가 달리던 중 신재영의 핸드폰에서 갑자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급하게 외쳤다.
“세워.”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강이설은 관성에 밀려 그대로 좌석 등받이에 부딪혔다.
멍하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신재영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다급함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급한 일이 생겼어. 지금 내려서 혼자 병원으로 가.”
터무니없는 말에 충격과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와 강이설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당신이 직접 일정표에 써 놓은 거잖아요...”
“내리라고 했어.”
신재영의 눈에 짜증이 스치며 차갑게 말을 끊었다.
강이설은 한순간 멍해졌다.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일정표대로 살아가는 그 신재영이 맞아?!’
강이설은 더 묻지도 못한 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외할머니는 계속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한 번만 보고 싶어 하세요. 꼭 같이 가야 해요. 그리고 이 도로에서는 택시도 안 잡혀요...”
그때 신재영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그의 눈빛이 단호해지더니 망설임 없이 그녀를 차에서 밀어냈다.
“이미 내 시간 5초를 낭비했어, 강이설. 난 네 감정놀이에 어울릴 여유 없어.”
강이설은 형편없이 바닥에 넘어졌고 발목에서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안 돼!”
그녀는 다급히 일어나 문을 열려 했지만 운전기사는 신재영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차를 몰아버렸다.
매캐한 배기가스가 얼굴을 스치며 마치 세게 맞은 뺨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 시간이 없었다. 분노에 잠길 틈도 없이 그녀는 지나가는 차를 붙잡으려 애쓰며 비틀거리듯 앞으로 달렸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도 그녀의 심장은 얼음물에 잠긴 듯 차가웠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강이설은 미친 듯 병실로 뛰어들었고 그곳에는 이미 노인의 마른 몸 위로 흰 천이 덮여 있었다.
“강이설 씨, 마음 단단히 잡으세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다가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게 낮추었다.
“에휴, 10분만 더 일찍 왔어도...”
그녀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무너져 오열하며 병상 곁으로 기어갔다.
노인의 손은 이미 마지막 온기마저 잃었고 그와 함께 강이설 마음속 남아 있던 마지막 따뜻함과 정까지 사라져 갔다.
신재영이 그녀를 도중에 버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외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은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심장 한쪽에 구멍이 난 듯 피가 계속 빠져나가는 느낌이었고 그저 끝없는 후회만이 밀려왔다.
“오늘 오후, 신재영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 주세요.”
영안실 밖에서 강이설은 흥신소에 전화를 걸었다.
십여 분 뒤 흥신소 쪽에서 공항 CCTV 영상을 보내왔다.
가득했던 의문과 억울함은 그가 다른 여자를 꼭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끝없는 분노와 충격으로 변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던 그 여자는 바로 그녀의 이복동생, 강지연이었다.
“재영 오빠, 갑자기 와 달라고 해서 원래 일정에 지장 준 건 아니죠?”
강지연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나 일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어.”
신재영은 잃었다가 되찾은 것처럼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강지연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그럼 언니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잖아. 내가 강이설과 결혼한 건 혼약을 지키고 양가의 사업을 위해서였을 뿐이야. 이 3년 동안 난 단 한 순간도 널 잊은 적 없어.”
그의 단호한 어조를 듣는 순간 강이설의 마음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내렸다.
3년 전, 강지연이 자유를 찾아 혼약을 피해 달아났고 아버지인 강혁재는 외할머니의 치료비를 빌미로 그녀를 위협해 대신 신씨 가문에 시집보냈다.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해서 신재영에게 늘 좋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겉보기엔 냉정했어도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관대했다.
그녀가 신가의 통금도 무시하고 한밤중에 클럽에 가 춤을 춰도 그는 미국에서 회의를 마치자마자 몸에 쌓인 피로도 무시한 채 그녀를 데리러 왔다.
강이설이 과속 운전으로 사고를 당했을 때는 병실에서 밤새 곁을 지키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눈을 뜨고서 비꼬듯 말했다.
“신 대표님처럼 바쁜 분이, 어떻게 저를 간호할 시간이 나셨네요?”
신재영은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아내를 돌보는 것도 내 일정 중 하나야. 강이설,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 네가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
깊고 어두운 그의 눈빛이 그대로 그녀의 마음을 꿰뚫었다.
강이설은 자신이 신재영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그가 엄격하게 일정표를 지켜도 그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그러나 3년의 결혼은 그의 눈에는 그저 하나의 사업 계약에 불과했다. 그가 줄곧 사랑했고 원칙까지 깨며 선택한 사람은 오직 강지연뿐이었다. 심지어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조차 그는 단 한 번도 배려하거나 망설인 적이 없었다.
영상이 끝나고 몇 초 뒤 화면이 꺼졌을 때 강이설은 분노로 붉어진 자신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법무법인에 전화를 걸었다.
“이혼 합의서 하나 준비해 주세요.”
외할머니는 그녀의 곁을 떠났고 더는 그녀를 협박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 얼음처럼 차가운 결혼도 이제 필요 없었다.
신재영 역시 더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