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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주씨 가문을 언급하자 소은지의 눈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한유정을 제외하고 주변에서 아무도 그녀가 한때 주씨 가문의 큰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때 소은지도 대부분의 여자아이처럼 가족이 주는 아늑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자랐다. 그러다 13살 때, 아버지 주성민이 느닷없이 사생녀를 공개하며 이혼을 운운하자 어머니는 충격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의 내연녀와 사생녀가 당당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 되고 싶다는 사생녀의 한 마디에 아버지는 주은지라는 이름을 소은지로 바꾸고 그녀를 지하실에 가둬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지하실에서 무려 5년 동안 갖은 고문과 학대를 당한 끝에 마침내 가정부의 도움으로 주씨 가문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밤, 얇은 옷차림으로 눈 속에 웅크린 그녀는 앞길이 막막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이때, 박현우가 갑자기 나타나 거지처럼 초라했던 자신을 꼭 안아주었다. 당시 건넨 첫마디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바보야,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나랑 집에 갈래?” 그때부터 박현우는 그녀의 삶 속 한 줄기 빛이 되었다. 그를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소은지는 집을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했고, 마트와 주방을 오가며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했다. 오로지 박현우를 위해, 그가 언제 돌아와도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앞으로의 삶도 이처럼 오붓하고 행복하게 함께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젯밤 박현우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클럽에서 마주했던 그의 차가운 태도와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3년 법칙’이 겹치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불안과 답답함으로 조여 오는 듯했다. 소은지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면 혼인신고서 한 장과 새 생명의 탄생이 갑작스러운 냉담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박현우는 자신이 고작 택배기사일 뿐이라며, 집도 차도 없는 처지에 어찌 감히 결혼을 입에 올리겠냐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한 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바로 박현우에게 청혼하는 것이다. 설령 그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더라도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휴대폰 너머로 한유정이 거듭 설득했지만 소은지는 이미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날 오후에 백화점으로 달려가 결혼반지 한 쌍을 골랐고, 이어 마트에 들러 박현우가 좋아하는 재료들을 한가득 샀다. 오늘 밤 그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해 질 녘이 가까워질 무렵, 박현우가 집에 돌아왔다. 주방에는 이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은지는 얼른 마중하러 나갔고, 진심이 담긴 애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현우 씨, 일하느라 고생했어요. 오늘은 현우 씨가 제일 좋아하는 새우구이에요.”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질 때마다 박현우는 그녀를 품에 안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어젯밤 클럽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식탁 위에 놓인 따끈한 음식과 새우를 손질하다 생긴 그녀의 손가락 상처를 보고도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때, 박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단체 채팅방 알림이 화면 위로 떠 올랐다. [대박 사건! 소은지가 오늘 우리 매장에 와서 80만 원짜리 결혼반지 한 쌍을 샀대. 얘들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저 멍청이, 설마 박현우한테 청혼하려는 거 아니야?] [80만 원짜리 반지로 청혼을? 하하하! 빈민가 출신이니까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 현우한테는 장난감 취급도 못 받을걸?] [현우 씨, 청혼하게 놔둬. 대신 공개된 장소에서 하도록 해.] 마지막 메시지는 주나연이 보낸 것이었다. 박현우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조금 전까지 서려 있던 짜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은지야.” 이내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오늘 배송하다가 길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남친한테 청혼하는 여자를 봤거든. 그 정도로 해주는 여친이 있으면 남자 입장에선 평생 못 잊겠지?” 의미심장한 말을 듣는 순간, 소은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내 황급히 박현우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현우 씨, 갑자기 생각났는데 오늘 새우구이에 간을 안 한 것 같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다시 올게요!” 그리고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부랴부랴 뛰어갔다. 왜냐하면 결혼반지를 새우구이 속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소은지는 원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식탁 위에서 청혼할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공개 프러포즈를 바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분주히 휴대폰으로 주문을 넣었다. 색종이, 풍선, 꽃다발까지. 배송 주소는 인천 더스퀘어였다. 그곳은 인천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새우구이를 들고 식탁으로 가져왔다.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맛 한 번 봐봐요.” 박현우는 비닐장갑을 낀 뒤 새우 하나를 집어 맛보았다. 입가에는 미묘한 조롱이 묻어났다. “나쁘지 않네.” 소은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물었다. “현우 씨, 오늘 밤 8시에 더스퀘어에서 행사한다는데 나랑 같이 가주실 수 있어요?” “그래. 다만 업무가 아직 안 끝나서 8시에 바로 거기서 만나자.” 약속에 흔쾌히 응하는 그를 보자 소은지는 온통 청혼에 대한 긴장으로 머리가 복잡해졌고, 심장은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현우는 평소처럼 택배를 배송하러 집을 나섰다. 소은지는 그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부했다. “현우 씨, 운전 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요.” 박현우는 일부러 다정한 척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알았어, 이따 봐.” “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몸을 돌려 나갔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선 뒤, 그는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 방금 소은지의 볼을 만졌던 손가락을 박박 닦았다.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가 스쳤다. “나한테 청혼한다고? 하!” 그리고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발걸음을 옮겨 아파트를 떠났다. 한편, 소은지는 집을 깨끗이 정리한 뒤 예쁜 흰색 롱원피스로 갈아입고 얼굴에 연한 화장까지 했다. 오늘 밤의 청혼을 위해 준비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휴대폰 화면에 한 통의 메시지가 떴다. [어젯밤 내 차에 두고 간 물건이 있어요. 주소 보내주면 가져다줄게요.] 소은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젯밤? 차?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젯밤에 탔던 차는 단 한 대뿐.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그 변태 운전사였다. 지금 스토킹 당한 건가? 당황한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집 안에 낯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떨리는 손가락으로 답장을 보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죠?] 상대방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자기 할 말만 했다. [30분 안에 어젯밤 차를 탔던 곳으로 와요. 아니면 남자친구한테 보내줄 테니까.] 이럴 수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까지 알다니? 이 변태가 진작에 그녀를 미행했단 말인가? 오늘 밤 박현우에게 청혼할 예정이기에 이 시점에서 둘이 만나게 놔둘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오해를 사게 된다면... 소은지는 불안에 휩싸였다. 결국 가방 속에 몰래 호신용 스프레이를 숨기고, 지난번 택시 불렀던 장소로 향했다. 예상대로 익숙한 검은 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고, 주변 버스 정류장에는 기다리는 행인들도 있었다. 게다가 도로 양쪽에는 감시 카메라도 설치되었기에 이 남자가 어떤 목적이 있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는 감히 무언가를 하진 못할 것이다. 소은지는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 점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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