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3화

소은지는 검은 차 옆으로 다가갔다. 운전석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며 조각 같은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럽고 값비싼 정장을 입고 있었다. 흰 셔츠의 단추는 맨 위까지 잠갔고, 그 위로 길고 곧은 목선이 드러났다.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고귀하면서 세련되었다. 어제는 이 겉모습에 현혹되어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차에서 약 1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물었다. “나를 여기로 부른 목적이 도대체 뭐죠?” 방어적인 어조에 의심이 묻어났다. 자신의 첫인상이 좋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쁜 줄은 몰랐다. 순간, 한태현의 깊은 눈동자에 위험한 기운이 스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납치해서 서울로 데려가 가둬 놓고 10년 동안 억눌러 온 욕망이나 마음껏 풀어 버릴까?’ 그때, 귀속에 장착된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표님, 지금은 법치 사회라는 걸 꼭 명심하세요. 자, 심호흡하시고. 하나, 둘...” 다름 아닌 어젯밤 인천으로 밤새 달려온 개인 주치의 정민기였다. 현재는 그의 연애 코칭을 담당하기도 했다. 정민기의 말에 한태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악념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거칠어졌던 숨결도 점점 안정되었다. 그는 뼈마디가 또렷한 큰 손으로 자그마한 벨벳 상자를 소은지 앞에 내밀었다. 무덤덤한 목소리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거.” 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저한테 이런 거 없는데요?” “물건은 안에 있어요.”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가 상자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익숙한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자신의 물건이었다니! 어젯밤 이 머리핀을 찾지 못해 길에 떨어뜨린 줄로만 알았다. 소은지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날렵한 턱선은 싸늘한 기운을 풍겼고, 무심한 표정은 지나치게도 침착했다. 고귀하고 절제된 모습은 ‘나쁜 사람’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설마 정말로 머리핀을 돌려주려고 찾아온 건가? 소은지는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시종일관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한태현의 거만한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지인 중에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네?” 소은지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개인 연락처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절친 한유정뿐이었다. 한태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태현이라고 합니다.” 소은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유정이랑 성이 같다니? 정말 아는 사람인가? 소은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죄송해요... 방금 오해하고...” “변태라고 생각했나?” 한태현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소은지는 볼이 화끈거렸고,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경계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어폰 속에서 정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도남 콘셉트 잘 잡으셨어요. 이제 변태 취급은 안 당할 거예요. 하지만 남자친구 있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해요. 일단 핑계 대고 그 자리를 벗어나세요. 괜히 좋은 인상 또 망치지 말고.” 떠나라니? 눈살을 살짝 찌푸린 그의 모습은 썩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 그때,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 소은지의 휴대폰이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더니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네, 준비 다 끝났다고요? 바로 갈게요!” “어디 가는 거예요?” 한태현은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물었다. 소은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더스퀘어로 가야 해요. 남친한테 프러포즈할 거라.” 그러고 나서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는데, 아주 행복해 보였다. 정작 운전석의 남자가 ‘프러포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눈동자 속에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프러포즈라... 핸들을 잡은 한태현의 오른손 손가락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차갑고 무심한 척하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살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귓가에 정민기의 위로가 들려왔다. “소은지 씨는 원래 남자친구가 있잖아요. 3년 사귄 연인이고, 슬슬 청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지금은 대표님이 제3자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세요. 아무런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남의 여친을 빼앗으려면 한 걸음씩 천천히 접근해야 합니다. 일단 제 말 대로 심호흡부터 하세요. 자, 하나, 둘...” 툭. 순간,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한태현은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내 몰래 도어 포켓에 던져 넣었다. 이내 고개를 돌려 무심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태워다 줄게요.” 소은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왜요? 아직도 내가 변태 같아요?” 한태현이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깊고 매혹적인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압도했다. 소은지는 흠칫 놀랐다. 중생을 홀릴 듯한 눈동자에, 게다가 절친의 지인이지 않은가? 한유정이 아는 사람이라면 인품 또한 믿을 만했다. 대체 누가 감히 그를 ‘변태’와 연결하는 몰상식한 짓을 한 거지? 소은지는 속으로 살짝 찔렸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이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밀폐된 차 안은 소은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고, 고스란히 한태현에게 전달되었다. 한태현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얼굴은 시종일관 무덤덤했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프러포즈는 원래 남자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소은지가 웃으며 설명했다. “남자친구가 집도 차도 없어서 나랑 결혼하면 고생만 시킬까 봐 망설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청혼한 거예요. 사랑하니까 설령 빈털터리라도 그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다짐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빈털터리라도 남친과 결혼한다라... 참으로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였다. 나긋한 목소리는 분명 사랑스러웠지만 한태현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거슬렸다. 이때, 머릿속을 문득 스친 생각이 있었다. 굵직한 무언가로 그녀의 입을 막아 더는 듣기 싫은 말을 못 하게 하고 싶었다. 한태현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죠. 남자친구가 사고로 죽으면? 그래도 그 사람 말고는 결혼 안 할 거예요?” 소은지는 느닷없는 가정에 말문이 막혔다. 예의는 밥 말아 먹었나?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죽게 만들다니. 한유정의 지인만 아니었다면 또다시 그를 변태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짧은 침묵 후, 소은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제 인생은 온통 회색뿐이었어요. 그걸 밝혀준 사람이 바로 제 남자친구죠. 만약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저도 그 사람 따라갈 거예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순간, 한태현의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좋아하는 여자의 입에서 다른 남자를 향한 사랑을 듣게 될 줄이야. 그 기분은 씁쓸하면서도 잔혹했다. 이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자식... 죽여버릴까?’ 하지만 그녀가 슬퍼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서울로 데려가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황금 새장에 가두고, 정민기에게 최면을 걸게 해서 남자친구를 잊게 만들자.’ ‘마음도, 몸도... 전부 나만의 것이 되게.’ ‘그리고 남친은 제 정신이 아닐 때까지 고문해서 다시는 소은지를 넘보지 못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어때?’ 그는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좋네.’ 한태현은 힘주어 핸들을 꺾었다. 차는 고가도로에 올라타더니 곧장 고속도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