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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한유정과 달리 소은지의 시선은 [노민 그룹]이라는 네 글자에 고정되었다. 소은지는 마치 아주 무서운 거라도 본 사람처럼 손을 조금 떨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정아, 나 집에 갈래.” “그래. 데려다줄게.” “아니야, 괜찮아. 혼자서 갈게. 생각할 것도 좀 있고.” “그럼 돌아가서 푹 쉬어. 박현우는 다시는 만나지 말고. 알겠지?” 한유정은 소은지가 걱정되는지 당부하고 또 당부한 후 소은지를 태운 택시가 떠나는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 “은지야, 버텨내야 해...” 하지만 소은지는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고 어느 정도 멀어진 다음 바로 택시 기사에게 노민 그룹으로 가달라고 했다. 함정이 분명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3년이나 마음을 쏟아부은 결과가 왜 이런 처참한 꼴인지에 대한 대답만 듣고 싶을 뿐이었다. ... 노민 그룹 옥상.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소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은지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너무나도 익숙했던,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낯선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박현우는 등을 보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은지는 박현우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 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현우 씨, 나 왔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현우가 뒤로 돌았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웬 여자도 함께 뒤로 돌았다. “언니, 오랜만이야.” 주나연의 목소리가 옥상에 울려 퍼졌다. 소은지는 얼굴이 하얘져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였어...?” 질식할 것만 같은 기억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새엄마에게 상간녀라고 딱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새엄마와 이복동생인 주나연은 소은지를 미친 듯이 괴롭혔다. 먼저 주나연은 자기 절로 계단에서 구른 걸 소은지가 밀었다고 거짓말하고는 아버지더러 소은지의 이름을 주씨 가문 족보에서 지우게 한 것도 모자라 그녀를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서 살게 했다. 그리고 지하실로 가서는 이현주와 함께 소은지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7년을 사랑으로 키운 강아지인 흰둥이의 가죽을 박박 벗겨버렸다. 강아지의 사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자신들이 지하실에 푼 쥐들이 그 사체를 갈기갈기 발라먹는 과정을 소은지가 지켜보도록 했다. 소은지는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온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주나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다가간 후 소은지를 향해 이겼다는 미소를 지었다. “언니 오늘 우는 거 너무 짠하더라. 현우 씨가 왜 언니를 모른 척했는지 궁금하지? 그 이유, 내가 대신 얘기해 줄게.” “아, 일단 이것부터 얘기해야 하나? 3년 전에 도우미가 언니를 내보내 준 거 말이야. 그거, 사실은 내 지시였어. 예전부터 계속 창문으로 도망치고 싶어 했잖아. 도망치면 언니 인생에도 희망이 찾아올 줄 알았던 거지?” “그래서 언니한테 희망을 보여준 거야. 언니가 작은 희망들을 끌어모아 천천히 높이 올라가다 기어코 행복의 최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때 그간 언니가 품었던 희망들을 한 번에 와장창 깨트리고 싶었어.” “언니, 나는 고작 손가락 한번 까딱하는 거로 언니 희망을 깨부술 수 있는 사람이야. 언니 아빠도 내 거고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도 내 거야. 언니 거는 언니 엄마밖에 없어. 그런데 죽어버렸네?” 주나연은 손가락으로 어두컴컴한 구석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기 보여? 저기가 바로 언니네 엄마가 투신자살한 곳이야.” “언니네 엄마도 한때 아빠한테 기생한 벌레처럼 살더니 어쩜 언니도 똑같아? 언니도 내 약혼자한테 들러붙은 기생충이었잖아. 모녀가 아주 똑 닮았어. 집에서 요리하고 세탁기 좀 돌린다고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실은 무슨, 자존감 바닥난 쓸모없는 도우미겠지.” “그래서 말인데 엄마 외롭지 않게 지금이라도 엄마 곁으로 가버리는 건 어때? 시궁창 같은 인생 좀 그만 살고 말이야.” 주나연은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소은지가 철저한 절망을 느끼고 자기 엄마처럼 투신자살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소은지는 악독한 주나연의 말에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바로 그녀가 받은 대답이었다. 3년간의 사랑은 그저 주나연이 그녀의 숨통을 조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소은지는 창백해진 얼굴로 박현우에게 물었다. “현우 씨, 하나만 물을게요. 나랑 함께 보냈던 생일, 나랑 함께 맞이했던 새해, 나랑 함께 봤던 일출과 일몰... 우리가 함께했던 그 많은 나날 중에 정말 현우 씨 진심은 하나도 없었어요...?” 박현우는 일렁이는 소은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쓸데없는 얘기 지껄이지 마. 네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무릎 꿇고 나연이한테 사과하는 것뿐이니까.” “사과하라고요? 주나연한테?” 소은지는 눈물을 꾹 참은 채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극도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면 웃음이 먼저 튀어나온다더니, 정말이었다. “내가 왜 사과를 해요? 아아, 내가 현우 씨 약혼녀가 원하는 대로 이곳에서 뛰어내리지 않아서?” 박현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 내리며 혐오가 가득 담긴 얼굴로 소은지를 노려보았다. “왜냐고? 네가 고작 질투 때문에 나연이를 계단에서 밀어버렸으니까! 네 그 더러운 마음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착한 나연이가 장애를 얻은 것도 모자라 정신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으니까!” “소은지, 네가 지금 받고 있는 벌들은 다 진작에 받아야 했던 것들이야. 그러니까 나연이한테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소은지는 마치 히어로처럼 주나연을 지키고 있는 박현우를 보며 과거 일을 떠올렸다. 1년 전에 그녀가 골목길에서 하마터면 양아치들에게 당할 뻔했을 때 어둠 속에서 박현우가 튀어나와 그대로 양아치들을 때려눕혔다. “무릎 꿇고 내 여자 친구한테 사과해!” “머리도 조아려! 더 세게!” “내 여자 친구 얼굴 똑바로 봐. 한 번만 더 내 여자 친구 건드리면 그때는 죽여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소은지는 박현우가 자신을 위해서 화내고 주먹까지 썼던 그날을 가슴 한구석에 아주 깊이 새겼다.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입꼬리도 절로 올라갔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대가 졸지에 그녀가 되어버렸다. 박현우를 사랑했던 만큼,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 행복했던 만큼 소은지는 상처를 입고 가슴이 넝마가 되어갔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도 사실은 가짜일 수가 있었다. 엄마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주나연은 점점 무너져가는 소은지를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참, 언니는 모르지? 사실은 사람들이 내기를 좀 했거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언니가 과연 이 옥상에서 뛰어내릴지 말지.” “아, 그러고 보니 현우 씨는 아직 안 했네.” “현우 씨, 생각은 다 마쳤어? 뭐에 걸 거야?” ‘내기...?’ 소은지가 움찔했다. 자신의 생사가 유흥 수단에 이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현우는 소은지를 한번 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답변을 내뱉었다. “뛰어내린다는 것에 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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