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화 나, 가질래요?

서류를 들고 대표실을 찾은 심가희는 웨딩숍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손님, 지난번에 피팅한 웨딩드레스 수선이 끝났어요. 다시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네.” 전화를 끊고 노크하고 나서 문을 열었지만 곽도현은 자리에 없었다. 저번에도 혼자 다녀왔기에 이번만큼은 같이 가고 싶었다. 그런데 또 코빼기도 안 보였다.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된 터라 일단 먼저 출발했다.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를 지닌 복고풍 유럽식 건물의 웨딩숍은 해운시에서 최고급으로 손꼽힌다. 심가희가 해운시 곽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라는 걸 아는지라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직원들이 깍듯이 맞이했다. “웨딩드레스는 피팅룸에 준비되어 있어요.” 직접 안내하려는 직원을 보자 심가희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저 혼자 갈게요.” 구불구불한 복도를 따라 각양각색의 화려한 웨딩드레스들이 양쪽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감상했고, 카펫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순간, 피팅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쉬, 그러는 거 아니야.” “왜요? 저 그냥 삼촌 결혼식에 가고 싶어서... 들러리로 참석하는 것도 안 돼요?”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억울한 듯한 여자의 대답. 심가희는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내 피팅룸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응.” “싫어요! 마지막으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네가 오면 난 도망치고 싶어질 테니까.” 남자는 마음이 약해진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말 들어. 너 쇼핑 좋아하잖아. 명강시에 며칠 가 있어. 결제는 내 카드로 하고, 결혼식 끝나면 바로 갈게.” “그럼 난 뭐죠? 삼촌의 조카? 아니면 몰래 숨겨둔 애인? 차라리 이만 날 놓아줘요, 삼촌...”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남자는 초조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내가 말했잖아. 중요한 건 신분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정녕 누구를 좋아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피팅룸 안은 정적이 흘렀다. “결혼... 하지 마요. 네?” 여자의 말투도 한층 누그러졌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해. 이게 다 우리의 미래를 위한 거야. 날 믿어.”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는 순간 심가희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 아무런 방어 할 틈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목소리의 출처는 다름 아닌 한 달 뒤 그녀와 결혼할 예정인 약혼자 곽도현, 그리고 곽씨 가문의 어르신 곽명철이 입양한 증손녀이자 곽도현의 명의상 조카인 최유진이었다. 무려 8년 동안 사랑해 왔고, 그렇게 다정하게 챙겨주던 사람이 속으로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온 세상이 순식간에 색이 바랜 듯했다. 피팅룸 안에서 다시금 인기척이 들려왔고, 곧이어 낯 뜨거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심가희는 소리라도 낼까 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고 무거운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퇴근 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스쳐 지나가는 커플을 보자 괜히 눈에 거슬렸다. 마치 그녀와 실패한 사랑을 비웃는 느낌이 들었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 심가희와 곽도현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다. 그녀는 4살 연상인 오빠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곽도현은 한 번도 귀찮은 티를 내지 않았고, 언제나 감싸주며 괴롭히는 아이들을 혼내주곤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최유진에게도 꽤 신경을 썼던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자 점점 더 잘생겨지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곽도현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스무 살이 되던 해, 곽명철은 두 사람의 혼약을 정식으로 정해주었다. 심가희는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고, 곽도현 역시 늘 다정하고 자상하게 그녀를 대했다. 심지어 하루라도 더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자기 비서로 채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이런 대화를 듣게 될 줄이야. 현란한 음악, 반짝이는 네온사인.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블루 나이트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바텐더가 주문한 테킬라 한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심가희는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만 지금은 연신 잔을 비웠다. 블루 나이트를 방문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곽도현과 함께 왔었다. 그날은 곽도현 친구의 생일이었고, 사람들이 장난삼아 둘에게 러브샷을 하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거절했다. “그만해, 얘 술 못 마셔. 괜히 겁먹을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를 배려한 게 아니라 러브샷을 하고 싶었던 상대가 따로 있었을 뿐이다. 심가희는 술잔을 꼭 쥔 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천천히 한 잔 들이켜던 순간 흐릿한 시선이 무심코 구석을 향했다. 한 남자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 조각상 같은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고, 은테 안경 너머로 그윽한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딱 떨어지는 네이비 슈트는 그의 몸매를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심가희는 귀신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고 애를 썼고 남자의 앞에 멈춰서서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나, 가질래요?” 곽도현은 지금껏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물론 사랑이라 믿었고 가장 중요한 첫날 밤을 위해 아껴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진한 착각이었을 뿐. 어차피 곽도현도 애인을 만나는데, 자기라고 멋진 남자랑 하룻밤 못 보낼 이유가 없지. 턱을 살짝 치켜든 남자는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묵묵부답했다.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미 이성의 끈을 놓친 그녀는 가방에서 지폐를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텐데.”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곧이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손해 보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심가희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 실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서 당신도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얼마나 한심한 운명인가. 곽도현에게 농락당하는 것도 모자라 눈앞의 낯선 남자한테까지 헌신짝 취급이라니. 이내 뒤돌아섰다. 그리고 발을 떼는 순간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명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후회 안 해?”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심가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이제 와서 겁먹은 건가?” 그윽한 눈동자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전 챕터
1/100다음 챕터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