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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제일 중요한 사람

“유리 씨, 대표님 서명이 필요한 서류가 있는데 오늘 접대하러 간 장소 좀 알려줄래요?” 심가희는 곽도현의 수석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의 모든 일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표님 오늘 접대 없으신데요? 퇴근도 일찍 하셨어요.” “그래요? 갑작스러운 일정도요?” “설령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저한테 식당 예약을 맡기거든요.” 하긴, 곽도현과 식사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약속을 잡아야 했기에 ‘갑자기’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즉, 비서가 얘기한 ‘급한 일’은 업무와 무관하다는 뜻이었다. 심가희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 곧이어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동료에게서 업무 관련 메시지가 도착했고, 내용을 확인한 후 무심코 인스타를 열었다. 화면 맨 위에 떠 있는 최유진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 환자복을 입은 채 한 남자의 가슴에 기대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멘트까지 첨부했다. [사랑이란, 내가 필요할 때 단 한 통의 전화로 달려와 주는 것.] 비록 얼굴은 안 보였지만 한눈에 그가 곽도현임을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목에 매고 있는 스프라이트 네이비 넥타이를 선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보름 전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것이자, 오늘 아침 곽도현이 매고 나간 그 넥타이기도 했다. 심장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 아파져 왔다. 이내 몸이 휘청거리자 두 손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꼭 짚고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더는 스스로 속이지 말자.’ 깊은 밤이 지나서야 겨우 잠이 든 심가희는 다음 날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어났어?” 곽도현이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들고나와 이미 아침 식사가 차려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볼에 모닝 키스하려고 했다. 입술이 가까워지는 순간 심가희는 고개를 홱 돌렸다. 곽도현은 어리둥절하더니 금세 눈치를 챈 듯했다. “어제 저녁 같이 못 먹어서 화난 거야?” 그녀는 묵묵부답한 채 옆을 바라보았다. “외국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돌아와서 밥 먹고 포커 좀 하다가 집에 오니 한밤중이더라고. 다음에 너한테도 소개시켜 줄게. 그리고 말 좀 해줘야겠어. 앞으로 나랑 약속 잡고 싶으면 안주인 허락부터 받으라고.” 곽도현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래주었다. 심가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그 친구가 최유진이에요?” 곽도현은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심가희는 실망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어젯밤 최유진이랑 함께 있었다는 거네요.” 곽도현은 고개를 들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유진이 교통사고가 났어. 가족한테 걱정 끼치기 싫고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차서 결국 나한테 전화하더라고.” 참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심가희는 냉소를 지었다. “나도 눈이 있어요.” 사진 속, 최유진이 그를 껴안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단순한 사이가 아니었다. 곽도현은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은 우리 집에서 십몇 년을 키운 증손녀야.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애인데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할 수 있겠어? 최씨 가문의 고아라 할아버지께서 꼭 잘 보살피라고 하셨어.” 최유진의 증조부와 곽도현의 할아버지는 전우 사이였고, 어릴 적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았다. 그 인연으로 인해 곽명철은 8살 때 그녀를 입양했다. “가희야, 우리 곧 결혼하잖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굳이 결혼까지 하려고 하겠어?” 곽도현은 진심이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심가희 역시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해요.” “정말 날 못 믿겠어?” 그녀의 집요한 태도에 곽도현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저 올해 스물넷이에요, 열네 살짜리 애가 아니라고요.” 심가희는 빨개진 눈으로 크게 심호흡했다. “도현 씨, 우리 헤어져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는 순간 곽도현이 그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본인도 알고 있으니 나잇값 해야지? 화내는 건 괜찮지만 반나절이면 충분해.” 곽도현은 우유잔을 억지로 쥐여주며 말했다. “밥 먹기 싫어도 우유는 마셔. 점심엔 같이 본가에 가자. 할아버지께서 전화하셨어.” 결국 변명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끝났다. 그녀의 감정은 그저 ‘투정’으로만 비쳤을 뿐이다. 어쩌면 자신이 믿든 말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심가희는 등을 돌렸다. “전 몸이 안 좋으니까 혼자 가요.” “푹 쉬어. 점심에 데리러 올게.” 곽도현은 말을 마치고 문을 나섰다. 그녀에겐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곽도현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면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결국, 심가희는 곽도현을 따라 곽씨 저택으로 향했다. 자신을 친손녀처럼 아끼는 곽명철을 거의 보름 넘게 보지 못했으니 겸사겸사 같이 식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곽도현이 손을 잡으려 했고, 그녀는 살짝 피했지만 결국 억지로 붙잡혔다. 거실에는 곽도현의 부모님과 곽명철의 셋째 아들 일가족이 있었고, 이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곽명철은 최유진의 부축을 받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심가희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 “이 녀석! 대체 얼마 만이냐? 혹시 도현이랑 싸운 거니? 말만 해. 할아버지가 아주 혼구녕을 내줄 테니까.” 백발이 성성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노인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가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곽도현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어떻게 가희랑 싸울 수 있겠어요? 괜히 누명 씌우지 마세요.” 심가희는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쳤다. “아니요. 다 제 잘못이에요.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 그나마 유진이가 심심풀이가 되어드려서 다행이죠.” 말을 마치고 최유진을 돌아보았다. 하얀 트위드 투피스를 입은 여자는 갸름한 얼굴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었다. 시선은 곽도현과 그녀가 맞잡은 손을 향했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곽명철이 고개를 돌리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네가 시집오면 난 두 명의 복덩이를 곁에 두게 되는 셈이지. 유진아, 어서 인사드려.” 최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말했다. “삼촌, 언니, 안녕하세요.” “언니라고 부르면 어떡해?” 곽명철이 정정해주었다. “큰엄마라고 해야지.” 최유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듯했다. 곽도현이 심가희의 어깨를 감싸며 눈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비슷한 또래인데 갑자기 호칭을 정리하면 가희도 어색할 거예요. 괜히 나이 든 기분일 테니까.” 심가희는 곽도현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표정 변화가 없었고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저녁 먹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 곽명철은 곽도현과 서재로 향해 일 얘기를 했다. 심가희는 산책하러 뒷마당에 나갔고 수영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 최유진이 다가왔다. “전혀 개의치 않고 도현 씨랑 본가에 올 줄은 몰랐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심하고 겁이 많던 그녀는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곽도현의 이름까지 부르며 턱을 치켜들고 심가희를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심가희는 화를 내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최유진이 피식 웃었다. “언니가 인스타 본 거 다 알아요. 왜냐하면 언니만 볼 수 있게 설정했거든요? 더욱이 사진 속 사람이 누군지 모를 리 없잖아요.” “아, 그거?” 심가희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사진 한 장이 뭔 대수라고. 네 삼촌 원래 여자한테 인기 많아.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군지 잊지만 않으면 돼.” 곽도현과 다툴 수 있어도 최유진이 우쭐대는 모습만큼은 절대 참지 못했다. 최유진은 안색이 대뜸 어두워지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바짝 다가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한번 테스트해보죠. 삼촌의 마음속에 누가 더 중요한지.” 말이 끝나자 심가희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최유진에게 붙잡혀 잇달아 수영장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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