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내키지 않아
심가희는 불쾌한 일을 굳이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설명한다는 자체가 곧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실패했는지를 인정하는 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부가 잘못했다니?”
심설아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좋은 분이 말이 돼? 언니가 나쁜 짓 해놓고 도리어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야?”
곽도현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에 이미 옳고 그름조차 구분 못 할 정도였다.
“넌 심 씨가 아니라 곽 씨로 태어날 걸 그랬네.”
심가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온주연은 곧바로 눈을 부라리더니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여보, 쟤 말하는 것 좀 봐요. 그래도 자기 동생인데, 그동안 친딸처럼 예뻐해 줬더니 말버릇이 저게 뭐예요.”
“실언한 사람은 작은 누나인데 엄마는 왜 맨날 작은 누나 편만 드세요?”
심재호가 보다 못해 심가희 대신 나섰다.
온주연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런 아들을 낳았을까? 남과 한편이 되다니!
“그만!”
심우진이 버럭 외치더니 심가희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다시는 이 얘기 꺼내지 마. 아빠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도현이랑 얘기해보마. 너도 성질 좀 죽여.”
이때, 집사가 급히 들어왔다.
“곽 대표님이 오셨습니다.”
곧이어 심가희는 현관에서 곽도현을 발견했다. 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남자는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양손에 선물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멀리서 다가오는 곽도현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 전화 주지 않으셨다면 네가 집에 온 것도 몰랐을 거야. 나한테 말이라도 하지, 그럼 같이 왔을 텐데.”
입가에 머금은 미소와 환한 얼굴은 마치 두 사람이 예전처럼 다정한 연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버지가 몰래 전화한 거였다니.
심가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우진을 바라보았다.
도움을 청하러 집에 돌아왔건만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호랑이 소굴에 떠밀었다.
심우진은 딸의 눈빛을 못 본 척하며 곽도현과 계속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온주연에게 식사를 다시 준비하라고 했다.
“괜찮아요, 아버님. 저는 이미 먹었어요. 오늘은 가희를 데리러 온 겁니다.”
곽도현은 웃으며 심가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심가희는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몸을 피했다.
“내 딸이 좀 버릇이 없지?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봐. 도현아,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
심우진은 속으로 딸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곽도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희를 잘 돌보겠습니다.”
차 안에서 심가희는 줄곧 창밖만 내다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아버지의 말이 맴돌았다.
심씨 가문이 곽씨 가문 보다 지위가 낮은 건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사람은 어떤 위치에 처하든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분명 곽도현의 잘못이라고 밝히며 파혼을 언급했는데도 끝내 그녀에게 타협을 강요한 이유는 뭐지?
혹시 곽씨 가문에게 신세라도 졌나?
아니면 두 사람의 혼약에 다른 의미라도 있는 건가?
재벌가의 정략결혼이야 흔한 일이라 이해는 했다. 다만 그녀와 곽도현 사이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곽명철이 그녀를 무척 아꼈던 것도 집안 배경 때문은 아니었다.
당최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었다.
“가희야, 어젯밤 미안했어. 내가 실수했어.”
곽도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상념에서 깨어난 심가희는 그제야 별장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사과를 무시한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 세워요. 여기서 내릴게요.”
운전기사는 곽도현의 명령에 따를 뿐, 그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꼭 이사해야겠어?”
곽도현은 묵묵부답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차라리 내가 별장에서 나갈 테니까 넌 돌아와. 여자 혼자 밖에서 지내는 건 너무 위험해.”
심가희가 피식 웃었다. 잘못은 본인이 저질러놓고 마치 그녀를 위하는 척이라니.
“괜찮아요. 나 결벽증 있는 거 알잖아요.”
한 번 때를 타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사람도 공간도 더러워진 마당에 다시 돌아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곽도현도 바보가 아닌지라 그녀의 말뜻을 당연히 알아챘다.
“아직도 화난 거 알아.”
이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버님도 연세가 있으신데 자꾸 걱정시키는 건 아니잖아?”
심가희는 다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입술을 꼭 깨물고 말없이 의자만 세게 움켜쥐었다.
곽도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당장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돼. 모레 네 생일만큼은 같이 보내자.”
그러고 나서 운전기사에게 월희성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심가희는 현재 그녀의 거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곽도현의 능력으로 어디에 있든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 곽도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레 데리러 갈게.”
심가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주소만 보내줘요.”
심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버지의 말처럼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아무리 내키지 않더라도.
...
이틀 뒤, 퇴근 시간.
동료들이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에 가 보자고 심가희도 불렀다.
“오늘 저녁은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같이 가요.”
점심때, 그녀는 이미 곽도현에게서 주소를 받았다.
그동안 생일 때마다 늘 바빴고, 출장 아니면 야근이라 거의 함께하지 못했다.
자리를 비워도 생일 선물만큼은 비서를 통해 전해주었는데 값비싼 보석이거나 명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곽도현의 마음속에 꽤 중요한 사람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비록 몸은 곁에 없을지언정 늘 자신을 생각하며 생일 선물을 미리 챙겨줄 정도로.
하지만 알고 보니 또 다른 형태의 보상에 불과했다.
곽도현이 예약한 레스토랑은 바닷가에 위치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어디서든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이런 곳에서 생일을 보낸다는 건 확실히 낭만적이긴 했다.
곽도현은 아직 도착 전이다. 심가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레스토랑에서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입구에서 또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왔다.
눈썰미가 워낙 좋아서 인파 속에서도 곽지환을 단번에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