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집에 가자
남자는 검은색 캐주얼 슈트에 브라운 라운드넥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심플한 옷차림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곽지환이 고개를 돌렸다.
심가희는 재빠르게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날 밤 일이 없었더라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어색했다.
“형,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곽지환 옆에 있던 여진성이 물으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주문하는 손님, 분주히 오가는 직원들.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곽지환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인테리어.”
“이 레스토랑 형이 디자인한 곳이잖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말을 마친 여진성이 주위를 둘러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디자인은 흠잡을 데 없지만 모임 장소로는 분위기가 좀 딱딱하긴 하지. 이런 격조 있는 공간은 나 같은 연애꾼한테 좀 부담스럽달까.”
그는 어떤 자리든 미녀들을 대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리하다가 탈 난다.”
곽지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던졌다.
여진성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걱정해줘서 눈물 나게 고맙군.”
말을 마치고 일행은 2층으로 올라갔다.
심가희는 메뉴판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곽지환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다시 맞닥뜨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최대한 빨리 먹고 나가는 수밖에.
“가희야?”
이때, 곽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길이 좀 막혀서.”
곽도현은 계열사에 다녀온다고 오후 내내 외근 중이었다.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무덤덤한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곽도현이 미리 주문한 음식을 내오라고 한 뒤 검은색 벨벳 상자를 하나 꺼냈다.
“생일 선물이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심가희는 고개를 숙였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또 귀걸이일 테니까.
그동안 항상 액세서리를 번갈아 가며 줬고 목걸이, 귀걸이, 반지 순이었다.
지난해 생일 선물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였으니 이번엔 아마 귀걸이 차례일 것이다.
“며칠 전 M국 경매장에서 봤는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바로 낙찰했어.”
꿈쩍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자 곽도현이 직접 뚜껑을 열었다.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정교한 커팅만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직접 해줄게.”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일단 밥부터 먹죠. 배고파요.”
마침 요리가 다 나왔는지라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열심히 집어 먹기 시작했다.
기분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음식을 낭비하면서 굶을 필요는 없으니까.
곽도현은 침묵을 지키더니 피식 웃었다.
“많이 먹어.”
이내 반찬을 부지런히 덜어주었다.
“네가 예전부터 건축 설계부에서 일하고 싶어 했잖아.”
그는 젓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마침 그쪽에 자리가 하나 비었어.”
심가희의 손이 우뚝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전공을 포기했던 것에 대해 늘 마음속 응어리로 남았다.
예전에도 건축 설계부로 옮기고 싶다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부 지원이라도 괜찮으니 꼭 도와달라고.
곽도현은 의아한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속 기억하고 있었어. 단지 공석이 없었을 뿐. 이제 빈자리가 생겼으니까 며칠 안으로 옮겨줄게. 그리고 어제 친구들과 밥 먹다가 들었는데 그중 한 명이 신경과 분야에서 유명한 전문의를 알고 있더라고. 며칠 내로 어머님 상태 다시 한번 정밀하게 검사해보자고 얘기해뒀어. 어머님이 깨어나서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길 바라는 거 나도 알아.”
심가희는 마지막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냈다. 단지 어머니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4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어 무려 20년 동안 누워만 계셨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문의를 찾아다녔지만 전부 속수무책이었다.
자식을 돌보기 위해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선택했고, 이후 온주연과 재혼했다.
“그 전문의가 정말로 우리 엄마를 치료할 수 있어요?”
심가희는 곽도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님 진료 기록을 보내줬더니 깨어날 확률이 꽤 높다고 하더라.”
심가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어머니가 깨어나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가.
그러나 또다시 실망만 찾아왔고, 나중에는 서서히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곽도현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가희야, 어머님께서 깨어나서 우리 결혼식을 보면 정말 좋아하실 거야. 지나간 일은 그냥 잊고 오늘 밤 나랑 집에 가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