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심가희는 조용히 있었다.
곽도현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사태를 더 키우지 않으려는 그의 선택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결혼식을 취소하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건축 디자이너가 되는 것과 어머니가 깨어나는 것, 그건 심가희가 오랫동안 간절히 바래온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 곽도현은 그 모든 걸 그녀 앞에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는 게 과연 옳은 걸까?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곽도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심가희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고 화면에 뜬 이름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최유진.
곽도현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가희야...”
하지만 금세 다시 벨이 울렸고 이번에도 최유진이었다.
심가희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오늘은 네 생일이야. 오늘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곽도현은 전화를 다시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밤, 나랑 같이 집에 가자. 응?”
그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심가희는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현 씨가 먼저 정리해야 할 일부터 하세요. 이사 문제는... 아직 생각이 없어요.”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곽도현이 곧바로 따라나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정리할 거 없어.”
“네가 돌아오지 않겠다면 억지로 데려오진 않을게. 대신 월희성까진 데려다주게 해줄 거지?”
그녀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그녀를 조수석에 앉혔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에서는 최유진에게서 걸려오는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차량 블루투스 때문에 내비게이션 화면이 수시로 전화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진짜 안 받을 거예요?”
심가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벨소리가 더는 듣기 싫었다.
곽도현은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고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곽씨 가문에 나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급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연락했겠지.”
차가 단지 정문에 도착하자 심가희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가희야.”
곽도현이 뒤따라오며 말했다.
“네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강지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생일 축하 인사였다.
“미안! 출장 중이라 함께하지 못했어. 그래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마. 내 마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으니까.”
과거 생일이면 늘 곽도현은 곁에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강지윤이 함께해주었다.
“괜찮아. 도현 씨가 같이 있어줬어.”
심가희는 물 한 잔을 따라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곽 대표님이 시간을 낸다고? 진짜 의외네.”
강지윤이 놀란 듯 말하다가 곧 덧붙였다.
“가희야, 분위기 깨고 싶진 않은데 남자가 갑자기 변하면 한 번쯤은 의심해봐야 해. 곽 대표님이 널 아끼는 건 분명하지만...”
심가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곽도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완벽해 보이는 남자였다.
“분위기 깬 거 아냐. 그냥 맞는 말이야.”
그 말에 강지윤은 바로 눈치를 챘다.
“너 그 말... 곽 대표님이 뭔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네가 출장 끝나고 오면 그때 얘기해줄게.”
“응. 어쨌든 네가 결정한 거라면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강지윤은 심가희의 말을 듣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곽도현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건 분명했고 그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것도.
통화를 끊자마자 곽다은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래 새언니, 생일 축하해! 선물은 내일 저택으로 보낼게. 오늘은 오빠랑 달달하게 둘만의 시간 보내고 나는 이만 방해 안 할게.”
곽다은은 곽도현의 친여동생으로 심가희와 사이도 꽤 좋은 편이었다.
잘나가는 변호사라 늘 바빴고 매년 생일마다 오빠가 곁에 없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였다.
관계는 좋았지만 그녀 역시 곽씨 가문의 사람이었기에 심가희는 곽다은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고마워. 지난번 가족 모임 때 못 봐서 아쉬웠는데 조만간 밥 한 끼 하자.]
언제부터였는지, 밖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마치 쏟아붓듯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창문 한쪽이 열려 있었고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보내며 창문을 닫으려 다가갔다.
그 순간, 시야 한켠으로 사람 그림자가 스며들었고 가로등 불빛 아래 선 얼굴을 보는 순간 심가희는 단번에 알아챘다.
곽도현이었다.
‘아직도 안 간 거야?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심가희는 우산을 챙겨 신발을 갈아 신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고 나서야 깨달았다.
곽도현에 대한 관심이 이제는 무의식처럼 굳어버렸다는 걸, 거의 조건반사에 가까웠다.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도착했고 곽도현 역시 그녀를 보고 말았다.
이제 와서 돌아설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우산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심가희는 조용히 우산을 들어 그 절반쯤을 그의 위로 내밀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데요?”
“아직 네 대답을 못 들었잖아.”
그는 젖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까 단지 앞에서 곽도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그거 때문에 여기 서 있었던 거예요? 도현 씨, 나한테 억지로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렇게까지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돌아와서 살라는 무언의 강요처럼 느껴졌다.
“가희야, 제발 날 믿어줘. 나 진짜로 최유진이랑은 다 정리했어. 딱 잘라 말했어. 그러니까... 한 번만 날 용서해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은 이미 감기 기운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심가희의 마음이 다시 한번 약해졌다.
8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해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고 아버지가 심씨 가문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떠올랐다.
어쩌면 이번 한 번쯤은 용서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좀 주세요. 생각해볼게요. 이 집에 막 들어온 참이라 조금 더 머물고 싶어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곽도현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좋아, 가희야. 네가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오래는 말고.”
그의 몸은 차가웠고 그녀의 옷도 어느새 촉촉히 젖어 있었다.
결국 심가희는 못 이긴 듯 말했다.
“일단 올라가서 따뜻한 물로 씻어요. 이따가 옷은 내가 사람 시켜서 보내줄게요.”
그 순간, 곽도현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