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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0825

투자 회사에서 ‘영업’이라는 직책은 듣기에 그럴싸해도 실제로는 접대부와 별 차이 없다고 다들 생각했다. 이게 강태훈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라니, 설마 어젯밤 일도 진성호가 일부러 꾸민 계획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하윤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현장에 다른 사람도 있었기에 자존심을 죽이고 겨우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절대 해고당할 수 없다.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절실했다. 진성호는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급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윤슬 씨는 주임 맞아요. 대표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는 그저 두 분이 같은 강주 출신이라 공통 화제가 있을까 싶어서 부른 것뿐이에요. 혹시 불편하시면 지금 당장 내보낼게요.” 이내 하윤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뒤돌아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강태훈이 입을 열었다. “앉아요.” “윤슬 씨, 못 들었어? 대표님께서 앉으라고 하시잖아.” 하윤슬이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자리에 앉자 진성호가 눈을 부라리며 강태훈에게 술을 따르라고 재촉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이때, 커다란 손이 불쑥 나타나 앞에 놓인 술잔을 가렸다. “과장님, 성산 그룹에 오래 남고 싶으면 편법 따위론 안 됩니다. 한양홀딩스 프로젝트에 관해 보고 받은 적 있어요. 현재 저희 측 입장이 불리하니 최대한 빨리 보충 자금 신청서 제출하고 손실을 최소화하세요.” 강태훈은 진성호에게 최후통첩을 내렸다. 잔뜩 찌푸린 짙은 눈썹이 그의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네, 대표님! 이번엔 제 실수가 확실합니다. 다음엔 꼭...” “다음은 없습니다.” 이내 와인잔을 가린 손을 치우더니 겉옷을 집어 들고 김서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고 하윤슬은 시종일관 공기 취급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지자 진성호는 그제야 분노를 터뜨리며 하윤슬을 향해 호통쳤다. “내가 왜 윤슬 씨 불렀겠어? 웃는 법도 몰라? 대표님이 네 눈치 보러 온 줄 알아?” “언제부터 주임 업무에 술 접대가 포함되어 있었죠? 전 그런 교육 받은 적 없어요.” “감히 말대답까지 해? 내가 식사 자리에 대표님 모셔 오느라 공을 얼마나 들였는데! 평소엔 얼굴도 예쁘장하고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하나 싶었더니, 이렇게까지 무쓸모일 줄이야. 그냥 진작 확 잘라버릴걸!” 한바탕 분풀이를 끝낸 진성호는 하윤슬을 째려보더니 문을 걷어차고 나가버렸다. 오늘은 하윤슬이 일하면서 겪은 가장 굴욕스러운 순간이었다. 울음이라도 터질 거로 생각했으나 눈시울만 시큰할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 업계에 발을 들일 때 이미 직급이 낮을수록 고개도 더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강태훈의 매정함은 예상 밖이었다. 동창이라는 관계에 어젯밤의 상대가 그녀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조금은 배려할 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 대로 차갑고 냉혹한 남자였다. 하이힐을 신고 호텔 복도를 따라 객실로 향하는데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강주하였다. “진 꼰대가 널 단톡방에서 쫓아냈던데? 무슨 일이 있었어?” “별거 아니야.” “미인계 실패했나 보네.” 강주하는 가끔 머리가 참 잘 돌아갔다. “난 진작 알았지. 대표님처럼 무심한 철벽남한테 그런 수는 안 통한다고.” 하윤슬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무심하다고?” 어젯밤, 사지가 부서질 정도로 몰아붙이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냥 겉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대표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대. 되게 오래 짝사랑했다더라?” 강주하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하윤슬은 문득 강태훈의 쇄골 근처에 있던 숫자 문신이 떠올랐다. 0825. 딱 봐도 날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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