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이하음은 그 말에 마음을 다잡은 후 진태하와 주설아를 데리고 이혜정을 만나러 갔다.
대표 사무실.
그 시각 이혜정은 이하음의 의자에 앉은 채 10억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매만지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의자에 몸을 더 기댄 채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이하음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이혜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왔어?”
이혜정은 대답 대신 일단 시선을 뒤로 옮겨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꾸며 놓으니 최영훈 못지않았다.
순간 질투심이 확 올라온 이혜정은 비아냥거리며 입을 열었다.
“옷이 날개네. 거적때기를 벗겨놓으니까 어느 정도 볼만 해졌...”
“어제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던 건 그쪽이 내 약혼녀라 그랬던 거니까 앞으로는 입조심 좀 해요. 나 이제 그쪽 약혼자 아니잖아요. 경고했는데도 또 눈살 찌푸려지는 말을 지껄이면 그때는 어르신을 대신해서 제대로 된 교육이 뭔지 보여줄 겁니다.”
진태하가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는 이하음이 아니었기에 이혜정의 막말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간단한 경고로 끝나지만 다음번에는 정말 말 그대로 교육을 해줄 생각이다.
이혜정은 책상을 탁 내리치며 뭐라 하려는 듯 입을 움찔했다가 어제저녁 이운산의 말을 떠올리고는 천천히 입을 닫았다.
‘아버지가 보낸 살수를 처리한 건 주설아가 아니야. 주설아보다 더 강한 자들로 보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스무여 명의 남자들을 처리한 건 진태하일 가능성이 커.’
“이혜정 씨, 여기는 화성이 아니라서 그쪽 편 들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주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금방이라도 한 대 치려는 듯 목과 손을 풀었다.
이하음은 이에 마음이 든든해졌는지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비켜. 거기 내 자리야.”
이혜정은 그 말에 표독스러운 눈길로 이하음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이하음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뼛속 깊이 각인된 반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확 가시며 이혜정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이하음과 이혜정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그 시각, 진태하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여자들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하음 씨는 그간 이혜정한테 줄곧 밀려와서 성격이 유약해.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1인분을 확실히 해내려면 지금 같은 마인드로는 안 될 텐데... 내가 멘탈을 제대로 단련해 줘야겠네.’
30초간의 대치 후, 이혜정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진태하도 있고 주설아도 있는 지금, 멋대로 날뛸 수가 없었다.
‘진태하와의 결혼을 파기한 것 때문에 할아버지의 관심이 이하음 쪽으로 가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 줄 수야 없지. 이하음은 주설아와 진태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하음은 의자에 앉은 후 담담한 얼굴로 이혜정을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줄래? 업무에 방해가 돼서 말이야.”
이혜정은 마음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양재 그룹에서 모든 계약을 다 취소하기로 했다며? 이러다 정말 회사 문 닫는 거 아니야?”
최영훈을 이용해 양재 그룹과 화양의 계약을 무산시킨 건 이하음의 예상대로 이혜정이 맞았다.
최씨 가문의 후계자가 직접 전화까지 했으니 양 대표로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혜정이 이곳으로 온 건 이하음이 절망에 허덕이는 꼴이 보고 싶어서였다.
“능력이 안 되면 그 자리를 하루빨리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야. 솔직히 네가 자회사를 맡은 뒤로 회사 사정이 점점 안 좋아졌잖아. 할아버지 건강 악화한 건 알고 있지? 이러다 너 때문에 더 안 좋아지실까 봐 내가 아주 걱정이 커.”
이혜정의 날 선 말에 이하음은 분노로 온몸이 다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책상 위에 내려놓은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
메시지를 보낸 건 한영애였다.
내용을 확인한 이하음은 한결 편해진 눈빛으로 이혜정을 바라보았다.
“화양과 거래하려는 회사가 양재 그룹밖에 없을 것 같아? 양재 그룹이라는 큰 거래처를 잃게 된 건 우리도 매우 아쉽게 생각하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쩌겠어. 없으면 없는 대로 새 거래처를 뚫어야지.”
“새 거래처? 화양 테크는 이미 시대에 뒤처졌어. 기존 거래처들이 아니었다면 너희는 진작에 망했을 거라고. 그런데 어떤 미친 회사가 너희랑 손을 잡자고 하겠어?”
이혜정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이에 이하음은 조금도 타격받지 않은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용진 그룹에서 우리와 손을 잡고 싶다고 먼저 연락이 왔다는데?”
용진 그룹은 한영애가 친정의 힘을 빌려 뚫은 거래처였다. 아직 확실히 계약하겠다는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연락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용진 그룹? 아, 그러고 보니 너희 외삼촌이 용진 그룹 직원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너희 엄마가 친정에 고개 숙여 얻어낸 거래처라는 소리네?”
이혜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거 어떡하지? 영훈 씨가 용진 그룹의 후계자랑도 사이가 매우 좋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거기 서!”
이하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분노도 있었지만 무력함이 제일 많이 감돌고 있었다.
한영애가 친정에 아쉬운 소리를 하고 얻어낸 거래처를 이혜정과 최영훈이 멋대로 망쳐놓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혜정은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뭐 할 말 남았어?”
이하음은 분노로 입술을 덜덜 떨며 좀처럼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혜정은 그 모습을 보며 이겼다는 생각에 속이 다 시원해졌다.
“혹시 봐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야? 그러면 성의를 보여. 무릎 꿇고 빌면 내가 지금부터 하려 했던 일, 다시 생각해 볼게.”
“저게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무릎 꿇으라는 말에 발끈한 건 주설아였다.
주설아는 이혜정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
그런데 그때, 웬 젊은 남자 한 명이 사무실 문을 발로 뻥 차버렸다. 날아간 문짝은 주설아에게로 향했고 휘둘러진 그녀의 주먹에 의해 찌직하고 금이 가버렸다.
보안상의 이유로 특수 제작된 철문이라 주설아는 어깨가 탈구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윽...”
주설아가 어깨를 부여잡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머리는 흰머리로 뒤덮여있었고 정장도 흰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백모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최영훈의 부하 중 한 명으로 24세라는 어린 나이에 무에타이 대회에서 챔피언을 거머쥔 상당한 실력의 남자였다.
방금 철문을 차버린 것만 봐도 얼마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설아야!”
이하음이 창백해진 얼굴로 주설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입술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이 패닉이 온 듯했다.
주설아는 이를 꽉 깨문 채 탈구된 어깨뼈를 다시 맞췄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였지만 겁먹은 얼굴을 할 수는 없었다. 이하음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괜찮아. 내가 안 되면 진태하 씨가 있잖아.’
한편 이혜정은 백모가 남을 공격하는 건 처음 봤던지라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이 남자의 실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기세로 눌러버리는 건데!’
“동생, 그래서 생각은 해봤어?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용진 그룹과의 계약을 방해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