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남해의 끝으로 가 나를 묶고 있던 모든 족쇄를 끊어내고 오겠다. 돌아올 시기는 따로 정하지 않았으니 나를 찾으러 오려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네가 산에 올라와 수행한 지도 어언 15년, 나는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다. 하지만 공력이 대단하다 하여 자만하지 말거라. 게으름은 만악의 근원이다.]
[강주시의 이씨 가문 영감과는 오랜 친우 사이라 내 진작 그 집안의 큰 손녀와 너의 결혼 약속을 해두었다. 그러니 이 편지를 보거든 속히 하산하여 이씨 가문의 영감을 찾아가거라. 결혼하고 나면 그간 나를 모셨듯 영감을 모시거라.]
[네게 해줄 말은 여기까지다. 이 결혼으로 네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든 그 역시 네 운명이니 받아들이거라.]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아침, 진태하는 옥패와 함께 놓여 있던 스승님의 편지를 다 읽은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태하는 천애 고아로 어릴 때부터 스승님을 따라 산에서 수련해 왔다. 스승님은 때로는 엄격한 아버지처럼, 때로는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그를 친자식 대하듯 대했다.
떠나기 전에 혼사를 정해준 것도 부모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진태하는 스승님의 그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진태하는 그렇게 말한 후 스승님이 향했을 방향으로 큰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간단히 짐을 챙겨 산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
천원산의 우거진 숲속, 웬 인영 하나가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공기를 갈랐다. 그러다 이윽고 한 마리의 새처럼 빠르게 회전하고는 도로 위에 착지했다.
진태하는 숨 한번 고르지 않은 채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정오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천원산은 강주시와 인접해 있는 산이지만 도보로 이동하면 자정이 넘어서야 시내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 사실에 진태하가 곤란해하던 그때, 차 한 대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며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진태하는 그 차량을 보더니 도로 중앙에 서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끼익.
날카로운 브레이크 음과 함께 차량이 진태하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고 가죽 재킷을 입은 여성 한 명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진태하는 인사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여성의 화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미쳤어요? 도로 중앙에는 왜 서 있는 겁니까? 죽으려 작정했어요?”
진태하는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주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혹시 강주시로 가시나요? 그런 거면 저 좀 태워주실 수 있으실까요?”
“무슨 이런 미친놈이! 내가 그쪽을 왜 태워줘요? 비켜요!”
주설아가 눈을 부릅뜬 채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럽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차비라면 제가...”
진태하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하지만 구겨진 돈을 세어보니 2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누굴 거지로 아나. 그리고 애초에 태워줄 생각도 없었거든요?”
주설아가 팔짱을 낀 채 뭐라 더 얘기하려는데 차 안에서 여자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타라고 해. 시간 없어.”
조수석에 앉은 이하음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간을 한번 확인했다.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와 계속 실랑이를 하며 시간을 허비할 바에야 차라리 빨리 태워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주설아는 그 말에 진태하를 더 무섭게 노려보았다.
“나 혼자였으면 절대 안 태워줬을 거예요!”
진태하의 시선이 조수석 쪽으로 향했다.
여자는 백옥 같은 피부에 장인이 온 마음을 다해 그려 넣은 건 같은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매우 검고 길었으며 몸매는 원피스에 가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라인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뭘 봐요? 빨리 안 탈 거예요?”
진태하의 시선을 발견한 주설아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외쳤다.
“아, 탈게요. 감사합니다.”
진태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얼른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에 시동을 건 주설아는 룸미러로 거적때기 옷을 걸친 진태하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혹시 그쪽 천원산 사람이에요?”
진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릴 때부터 스승님과 줄곧 산에서 살았습니다. 밭도 매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면서요.”
“그런데 왜 갑자기 하산했어요? 계속 밭이나 맬 것이지.”
“그게 실은 약혼녀를 찾으러 내려왔습니다.”
남자의 말에 앞쪽에 앉은 두 명의 시선이 동시에 뒤쪽으로 향했다.
“이것 참, 쑥스럽네요. 하하하.”
“푸핫, 그쪽도 약혼녀가 있어요?”
주설아가 대놓고 비웃으며 물었다.
그 비웃음이 언짢았던 것인지 남자가 조금 정색하며 말했다.
“네, 있습니다. 이씨 가문의 큰 손녀가 바로 제 약혼녀입니다.”
“뭐, 뭐라고요?”
주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그쪽 약혼녀가 이씨 가문의 큰 손녀라고요? 지금 농담하는 거죠?”
주설아가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이하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하음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거짓말 아닙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러 하산한 겁니다.”
좋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능력 좋은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바로 진태하의 평생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을 스승님 덕분에 손쉽게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씨 가문의 큰 손녀가 그쪽과 결혼할 일은 없을 겁니다.”
줄곧 가만히 있던 이하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왜죠?”
진태하가 조금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왜 그런지.”
이씨 가문의 큰 손녀라고 하면 다름 아닌 이하음의 사촌 언니였다.
강주시에서 제일 큰 가문의 후계자와 열애 중인 사촌 언니가 거적때기를 입고 있는 산골 남자와 결혼할 리가 만무했다.
이하음은 가소로운 듯 웃다가 다시 천천히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같은 이씨 가문의 손녀지만 그녀는 한 번도 사촌 언니만큼의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 봐도 결국에는 이씨 가문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받을 뿐이었다.
제일 좋고 제일 값진 건 늘 사촌 언니의 몫이었다. 공부도 못 하고 경영도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사촌 언니는 보란 듯이 회사의 임원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만약 몸이 편치 않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게 되면 이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이 첫째 아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둘째 아들 자식인 이하음은 영원히 사촌 언니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펑!
그때 묵직한 소리와 함께 승용차가 중심을 잃으며 비틀거렸다.
주설아가 급브레이크를 잡은 덕에 다행히 차량은 무사히 멈춰 섰다.
“어떻게 된 거야?”
이하음의 질문에 주설아가 차에서 내려 상황을 확인했다.
“타이어가 터졌어. 어떤 미친놈이 도로에 뾰족한 것들을 뿌려놓은 것 같아.”
뒷좌석에 있던 진태하가 창밖을 바라보며 이하음에게 물었다.
“저쪽에 있는 분들과는 아는 사이인가요?”
그 말에 주설아와 이하음이 앞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들이 각목을 든 채 천천히 차 쪽으로 걸어왔다.
이하음은 스무여 명의 남자들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차에서 내리더니 곧장 그들을 향해 물었다.
“당신을 뭐야?”
남자들은 대답 대신 천천히 움직이며 차를 에워쌌다.
주설아는 이하음을 자신의 뒤로 보낸 후 가죽 재킷을 벗어 땅에 던졌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며 남자들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죽으려고!”
그걸 본 진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하음에게 말했다.
“당장 친구분한테 돌아오라고 하세요.”
주설아의 주천 공력은 3단으로 상당히 실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양복을 입은 남자들의 주천 공력은 4단으로 주설아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하음은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진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쪽이야말로 나올 생각하지 말고 거기 가만히...”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쪽에서 주설아의 비명이 들려왔다.
주설아는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목이 잡힌 채 그대로 멀리 나가 떨어져 버렸다.
“커억...”
주설아의 입과 코에서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이... 이게 대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연하던 이하음의 얼굴에 두려움이 한층 어렸다.
주설아는 이하음의 제일 친한 친구이자 강주시에서 열린 무술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훌륭한 경호원이었다.
그런데 그런 주설아를 1분도 안 돼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이 정도의 고수들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이하음이 잔뜩 굳은 얼굴로 머리를 굴리던 그때, 남자 한 명이 빠르게 뒤로 다가와 그녀의 목을 움켜주었다.
압도적인 힘에 이하음은 단번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칼을 든 채 천천히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대장 남자를 바라보며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누가 당신들을 보냈지? 큰아빠야?”
“곧 죽을 사람한테 얘기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하음은 일말의 동요도 없는 남자의 태도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다 못했고 결혼도 못 해봤으며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제대로 된 효도 한번 못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점점 더 그녀와 가까워졌다.
절망감에 휩싸인 이하음은 더는 안 되겠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체념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차 안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하지? 아가씨가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