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진태하의 목소리였다.
진태하는 차창에 두 팔을 올린 채 매우 태연한 눈빛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하음은 눈을 번쩍 뜨고는 그를 향해 외쳤다.
“그쪽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요!”
‘차 안에 사람이 있었다고?’
대장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진태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이하음의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차 안에 누군가가 있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기척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았다. 즉, 만만하게 볼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편 이하음은 진태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스무여 명의 남자들은 누가 봐도 자신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었으니까.
이제 차 안에 있다는 것도 들켰으니 남자들에게 제거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한 명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는 진태하의 멱살을 잡았다.
“쯧.”
진태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바로 살기를 가득 담아 남자를 바라보았다. 따뜻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퍽!
양복을 입은 남자의 몸이 마치 짐짝처럼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남자의 가슴팍은 진태하가 꽂아 넣은 주먹 그대로 움푹 파여버렸다.
진태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리더니 마치 우아한 나비처럼 사람들 틈을 누비며 날쌔고 정확하게 묵직한 공격을 퍼부었다.
퍽퍽퍽!
압도적인 힘과 압도적인 속도에 남자들은 뭘 해보지도 못한 채 땅에 쓰러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한꺼번에 덤벼!”
대장 남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하지만 외친 보람도 없이 바로 다음 순간 모든 부하가 다 쓰러져 버렸다.
진태하가 스무여 명의 남자들을 처리한 시간은 고작 10초 남짓이었다.
“이... 이게 말이 되나?”
대장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에 손이 다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옷매무새만 만질 뿐이었다.
‘보통 놈이 아니야. 내가 혼자 상대할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대장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대뜸 이하음 쪽으로 돌진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하음을 인질로 잡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진태하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잠깐 사이에 그의 등 뒤로 와버린 것이었다.
대장 남자는 마치 사신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건 5단, 7단... 아니, 이건 9단이야! 이 어린놈이 벌써 주천 공력 9단이라고?! 천원산에 내가 모르는 종사급 고수가 있었나? 아니, 애초에 이게... 말이 되나?’
진태하는 한 손을 남자의 어깨에 올린 채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꿇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장 남자는 고막이 파열되고 간담이 다 찢어지는 듯한 압박감이 들었다.
꼭 태산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쿵!
아스팔트 위에 남자의 무릎이 깊게 박혔다. 이 정도면 다리를 못 쓰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윽...!”
대장 남자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평생 절름발이로 살 바에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아!’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어금니에 숨겨뒀던 독이 든 캡슐을 한 방에 터트려버렸다.
뒤늦게 낌새를 눈치챈 진태하가 손을 뻗어 입을 벌려보았지만 독이 퍼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하, 프로다 이건가?”
해외에 있는 살수 중에는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임무를 맡았을 때 실패를 대비해 몸 어딘가에 독을 숨겨두는 사람들이 많다.
‘강주시에도 그들과 비슷한 살수가 있을 줄이야.’
이하음은 멍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한번 훑은 후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아무렇게나 흔들리고 있는 머리카락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려진 입매, 그 모든 것들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어우러지자 불안에 떨었던 그녀의 마음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이하음은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는 진태하에게 물었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진태하는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저 밭매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밭매는 사람이 10초도 안 돼서 스무여 명의 남자들을 해치운다고?’
이하음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정체를 추궁해 내는 것보다 더 급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설아야, 너 괜찮아?”
이하음이 주설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주설아는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이를 꽉 깨문 채 대답해 주었다.
“윽... 난, 난 괜찮아...”
그때 진태하가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이며 주설아의 상태를 살폈다.
“장기에 손상을 입어서 몸 내부가 불안정한 상태네요.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치료할 줄도 알아요?”
“의사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저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이하음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진태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손가락에 기를 모으고 주설아의 혈 자리를 빠르게 세 번 찔렀다.
“커억!”
주설아는 거무튀튀한 피를 토한 후 다시 이하음의 품에 안겼다. 고작 세 번 찌른 것뿐인데 얼굴색이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다.
“설아야, 지금은 어때? 좀 괜찮아?”
이하음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괜찮아졌어.”
주설아는 신기한 듯 연신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금 그 상처는 중환자실에 꼼짝없이 몇 달간 누워있어야 할 상처였다. 하지만 진태하의 손짓 세 번에 통증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의 의술이라면 신의도 혀를 내두를 게 분명했다.
“저는 그저 통증을 가볍게 해주고 기혈을 안정화해 준 것뿐입니다. 손상된 근육과 장기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도록 하세요.”
“고, 고마워요.”
진태하를 바라보는 주설아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고맙긴요. 타이어는 제가 갈아드리겠습니다.”
주설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태하의 등을 바라보며 이하음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음아, 저 남자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너랑은 형부랑 처제 사이로 묶이게 될 사이잖아.”
진태하 덕에 목숨을 구한 건 맞지만 이하음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였기에 조심하게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이혜정이 저 남자를 등에 업고 나한테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
하지만 이하음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사촌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설아야, 저 남자 말이야.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너희 할아버지랑 비교하면 어때? 그래도 너희 할아버지가 더 위인 거지?”
주설아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우리 할아버지보다 적어도 열 배는 더 강해!”
이하음이 깜짝 놀라며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
주설아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강주시 무술 협회의 회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보다 열 배는 더 강하다니.
이하음의 시선이 다시금 진태하 쪽으로 향했다. 어쩐지 눈빛이 조금 이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타이어 교체가 끝난 후 차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이하음이었다.
“동산로 128번지로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혹시 아십니까?”
진태하가 휴대폰을 매만지며 물었다.
“목적지까지 데려다줄게요.”
이하음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짜로 얻어 타는 주제에 목적지까지...”
“마침 나도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이었거든요. 목적지가 같아서 태워주는 것뿐이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태하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할아버지 집이면 혹시...”
‘설마 이 아가씨가 바로 내 약혼녀인 건가?’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저는 이씨 가문의 둘째 손녀예요.”
“둘째면... 제 처제인 건가요?”
이하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하하하, 이것 참. 하산해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가족 될 사람이었다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또 없네요.”
진태하는 기분 좋게 웃고는 이내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처제, 앞으로 또 오늘 같은 일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요. 내가 다 해결해 줄게요.”
“그럴게요.”
이하음은 억지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질투의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아무 능력도 없는 사촌 언니에게 이렇게 대단한 남자를 약혼자로 점찍어둔 할아버지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오후 3시.
차량이 이씨네 별장 앞에 멈췄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대문도 그렇고 정원도 그렇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이하음은 아버지인 이운해를 발견하고는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아빠, 대문과 정원에 있던 것들은 다 뭐예요? 유언장 때문에 저희를 여기로 불러 모은 거 아니었어요?”
이하음은 검은 양복 남자들에 관한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운해는 딸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었다가 금방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온다는 얘기와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유언장에 관해 확실히 하겠다는 얘기밖에는 들은 게 없어.”
이운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씨 가문의 제일 큰 어르신인 이석범이 가문 사람들을 한가득 대동하고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