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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정신 차려요.” 조민주는 비웃으며 눈을 흘겼다. 그건 경멸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아무리 동서가 배씨 집안에 시집왔어도 성씨 집안이 우리 덕 볼 일은 평생 없을 거예요.” 성보람은 황당해서 코웃음을 쳤다.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게 뭐 그리 불편하신가요? 우리 아빠가 사업하려고 사람들한테 부탁 좀 한 건 맞아요. 근데 요즘 세상에 부탁 한 번 안 하고 사업하는 사람이 어딨죠? 형님, 세상은 전부 배씨 집안 같은 줄 아시나 본데 솔직히 말해드릴까요? 형님이 너무 높은 데만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잊으신 것 같네요.” “어디서 감히, 어린 게 어른한테 훈계까지 해?” 조민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성보람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가요. 먹고살려고 상사 눈치 보고 작은 계약 하나 따내려고 체면도 내려놓고 다 살아남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성보람은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조민주가 늘 깔보는 태도가 더더욱 꼴 보기 싫었다. ‘출신이 뭐 어때서? 남의 돈 뜯어먹은 것도 아닌데.’ “너...!” 사람들 앞에서 몇 번이고 자기 말을 거스르는 성보람이 기어이 미웠다. 조민주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때 하지민이 부랴부랴 나서며 그녀를 말렸다. “언니, 아직 애잖아요. 어린애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조민주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하지민의 손을 꼭 잡으며 성보람에 대한 미움이 더 깊어졌다. 이 여잔 반드시 배씨 가문에서 내쫓겠다고 다짐했다. “언니, 저한테 아직 소개도 안 해주셨잖아요.” 하지민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조민주는 한숨을 쉬더니, 곧 입꼬리를 올렸다. “이 아이가 바로 도련님 치병으로 붙여준 여자야.” 그리고 성보람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소개해줄게요. 이분은 하지민, 하씨 가문의 딸이고 도련님의 전 여자친구였어요. 도련님이 사고 난 날도 지민이 해외 나가는 거 배웅하러 갔다가 그런 거예요. 원래 우리 집에서는 지민이한테 치병을 부탁하려 했는데 해외 공연 중이라 지민이 부모가 사고 소식 숨겼거든요. 아니었으면 그 자리는 동서가 아니라 지민이가 앉아 있었겠죠.” 이제야 성보람은 모든 게 이해됐다.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지만 하지민이 정말 사고 소식을 몰랐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명문가 딸일수록 더 영악하고 빨랐다.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자리에 굳이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지금 와서 이런 말 꺼내는 건, 배선우가 살아났으니 다시 엮일 심산일 것이다. “그렇군요.” 성보람은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고 의견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조민주와 하지민은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성보람은 아무 말 없이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고 두 사람 모두 슬슬 초조해졌다. 조민주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비꼬았다. “지민이는 세계적인 연주자예요. 동서는 뭐가 있죠? 나라면 눈치껏 자리 비켜줄 텐데.” “네, 비켜드릴게요.” 성보람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신이 앉았던 소파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민 씨, 여기 앉으세요.” “...” 하지민은 말문이 막혔다. ‘성보람... 순해 보이는데 은근히 독한 타입이네.’ “동서, 지금 나 무시하는 거예요? 내가 말한 그 자리가 소파 자리겠어요?” 조민주는 꾹 참고 있던 분노가 또 치밀었다. 성보람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형님, 그렇게 하지민 씨가 마음에 드시면 형님 자리를 내어 드리세요. 이 정도면 둘째 며느리 자리는 물론, 맏며느리 자리까지 맡겨야겠네요.” “성보람, 너 정말 죽고 싶구나.” 조민주는 더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있던 컵을 던졌다. 성보람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조민주는 이를 악물고 다가가려 했지만 하지민이 또 말렸다. “언니, 그만하세요. 괜히 몸 상하시겠어요. 오늘 제가 괜히 온 것 같아요. 먼저 갈게요. 다음에 또 뵐게요.” 이미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엮일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조민주와 성보람이 싸우기라도 하면 배씨 부부는 괜히 자기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지민아, 내가 데려다줄게.” 조민주는 서둘러 따라 나섰다. 성보람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민이라는 여자, 만만찮네.’ 성보람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 고급스러운 상자 두 개를 힐끗 바라봤다. 조금 궁금했지만 손대지 않았다. 괜히 손댔다가 또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른다. ... 주차장. 조민주는 하지민을 차에 태웠다. “지민아, 정말 민망하네. 사실 너한테 털어놓자면 저 성보람이 들어온 뒤론 하루도 속 안 뒤집힌 날이 없어.” 조민주는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얼마 전엔 나더러 아줌마라더라. 내가 그 꼴을 듣고 가만있겠니? 근데 또 어르신은 그 애를 유난히 아끼셔.” 하지민은 적당히 동조해줬다. “언니, 그 아이 성격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언니가 참아야 할 일 많겠네요.” 하지민은 일부러 동정하는 말투로 덧붙였다. “요즘 병도 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잖아요. 언니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보기엔 계속 저 아이랑 살다간 진짜 암이라도 걸릴 판이야.” 조민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이 공감했다. 하지민은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언니도 조심하셔야 해요. 저런 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기세등등해져요. 나중엔 언니까지 무시하고 올라설지도 몰라요. 잘 아시잖아요. 집안 형편 안 좋은 사람이 더 욕심 많다는 거.” “그럴리가...” 조민주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식었다. “지민아, 네가 내 동서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린 분명 잘 맞았을 거야.” 하지민은 눈시울을 붉혔다. “저도요. 근데 인연이 없었나 봐요. 어쩌면 이번 생엔 선우 말고 다른 사람은 사랑 못 할 것 같아요.” 조민주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아렸다. “지민아, 걱정 마. 도련님은 곧 성보람이랑 이혼할 거야.”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참, 아까 그 다이아랑 시계 가격 알려줘. 내가 돈 보낼게. 내 말 들어. 그건 너무 비싸. 그런 건 받으면 안 돼. 마음만 받을게.” 하지민을 겨우 보내고 나서 조민주는 하지민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성보람한테 나는 안중에도 없어.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몰라.’ ‘그 전에 반드시 쫓아내야 해!’ 거실로 돌아오니 성보람은 없었다. 테이블 위 상자 두 개. 그중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조민주는 급히 확인했고 사라진 건 다이아 목걸이였다. 순간 그녀는 눈이 커지며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내 목걸이 못 봤어요?” “네. 저는 아까 하지민 씨한테 차 대접하고 줄곧 부엌에 있었어요. 나간 적도 없고요.” 박희수는 자신이 의심받을까 봐 급히 해명했다. 조민주는 아까 하지민을 배웅할 때, 성보람이 거실에 남아있던 게 떠올랐다. ‘설마... 분명히 그년 짓이야.’ 조민주는 바로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동서! 당장 안 나와요?” 성보람은 방금 막 올라와 책상 앞에 앉아 여름방학 과제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엉덩이 붙인 지 얼마 안 됐는데 조민주가 또 들이닥쳤다. “형님, 또 왜 그러세요?” 성보람이 묻자 조민주는 숨부터 거칠게 몰아쉬며 다가왔다. “동서, 내 목걸이 어디 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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