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아저씨, 제가 그깟 몇 푼에 굽신거릴 것 같으세요? 그리고 제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4백억은커녕 배씨 가문에서 아저씨한테 책임을 물었을지도 몰라요.”
성보람이 또박또박 말했다.
화가 난 성범철은 마음 같아서는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알았어. 내일 백억 원을 입금해줄게.”
“고맙습니다, 아저씨.”
성보람은 그제야 좋게좋게 말했다. 분노가 끓어오른 성범철은 씩씩거리면서 나가버렸다.
방희진은 남편이 떠난 뒤에야 딸을 붙잡고 말했다.
“보람아, 아저씨를 너무 미워하진 마. 요즘 민서 일 때문에 심란하시잖아. 게다가 워낙 큰돈이라 너한테 너무 많이 주면 날 데리고 도망갈까 봐 걱정해서 저러시는 거야.”
“엄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성보람이 현실을 말해주었다.
“4백억 원이나 되는 돈을 누가 쉽게 내놓겠어요?”
방희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 그래도 우리 모녀한테 잘해주잖아. 그때 저 사람 아니었으면 넌 학교도 못 다녔어.”
“엄마는 아저씨가 해준 것만 생각하고 엄마가 이 집에서 빨래하고 밥하고 아저씨 딸까지 돌봐줬다는 건 생각 안 했어요? 아내가 할 일, 도우미가 할 일 구분 없이 전부 다 하시면서 돈 한 푼 안 받으시잖아요. 아저씨가 밖에서 이렇게 좋은 아내를 또 찾을 수 있을까요?”
성보람은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어머니가 옛날 시대 여자처럼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대부분을 가지고 저는 조금만 달라고 했어요. 성씨 가문을 구한 사람은 전데 당연히 가져야죠.”
성보람은 그녀의 행동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그녀의 말에 방희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
다음 날 성보람이 늦잠을 자고 있는데 방희진이 문을 두드렸다.
“보람아, 배씨 가문 사람이 왔어.”
“금방 나갈게요.”
성보람은 잽싸게 일어나 양치질하고 세수한 뒤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배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은 30대 남자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었는데 딱 봐도 직장의 엘리트 같았다.
“성보람 씨, 안녕하세요. 저는 배선우 씨의 비서입니다.”
비서가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 양대은이라고 적혀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성보람은 배선우가 주기로 약속한 백억 원을 성씨 가문 사람들이 알까 봐 양대은을 데리고 바깥 베란다로 나갔다.
양대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둘만 남게 된 후 성보람이 청순가련한 얼굴로 물었다.
“배선우 씨가 돈을 제대로 입금했나요? 돈이 들어온 걸 확인하면 사인할게요.”
“...”
양대은은 어이가 없었다.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똑 부러져? 전문가들이 괜히 요즘 젊은 애들이 너무 현실적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게... 배선우 씨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양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보람의 붉은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누가 봤으면 부모라도 잃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말도 안 돼요.”
성보람이 다급하게 말했다.
“배선우 씨 절 엄청 싫어해요. 저보고 꺼지라고도 했다고요.”
그러자 양대은이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도 꺼지라고 한 적이 있지만 지금도 여기서 멀쩡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혹시 만우절인가요?”
성보람은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
“봐도 소용없어요. 배청운 회장님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배선우 씨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요.”
양대은이 이어 말했다.
“오늘은 성보람 씨를 모시러 왔어요.”
성보람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혼하면 얼마나 좋아요. 배씨 가문에서도 저를 데려간 건 액운을 쫓아내기 위해서잖아요. 이젠 배선우 씨도 깨어났으니 이혼하는 게 맞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성씨 가문의 형편이 별로라 배씨 가문과 어울리지 않아요.”
“저한테 이런 말씀 해봤자 소용없어요.”
양대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배선우 씨가 성보람 씨를 꼭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안 그러면... 성씨 가문을 없애버리겠답니다.”
성보람은 마음 같아서는 확 죽어버리고 싶었다.
성씨 가문에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건 사실이었기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배은망덕한 사람도 아니고.
“알았어요. 짐 정리하고 같이 가요, 그럼.”
성보람은 축 처진 모습으로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배선우가 이혼을 원치 않는다는 소리에 성범철과 방희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녀가 옷을 챙기는 동안 성범철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당부했다.
“보람아, 무슨 수를 써서든 배선우랑 빨리 이혼하든지 아니면 널 사랑하게 만들든지 해야 해. 네가 우리 집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야.”
“최대한 절 싫어하게 만들게요.”
성보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배선우가 그녀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
한 시간 후 성보람은 다시 VIP 병실로 왔다.
요 며칠 몸조리한 덕에 배선우의 컨디션이 눈에 띄기 좋아졌다.
고급스러운 잠옷을 입고 침대에 기대앉은 그는 성보람이 들어오자 냉랭하게 비웃었다.
“어깨가 아주 하늘로 솟았지? 너희 집안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아버지가 이혼을 반대하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성보람은 기가 막혔다.
“그러게 말이에요. 배씨 가문도 참 답답하긴 해요.”
그녀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라면서 우리 같은 서민 가문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성씨 가문이 대단했더라면 진작 배씨 가문을 밀어내고 소운시의 신흥 재벌 자리를 꿰찼을지도 모르죠.”
“풉.”
짐을 들고 들어오던 양대은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터뜨렸다.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고 나서야 멈칫하더니 일부러 헛기침했다.
배선우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겨우 좀 나아졌던 안색이 더 엉망이 돼버렸다.
“양대은, 누가 얘를 여기로 데려오라고 했어? 아버지가 얘를 좋아하시잖아. 본가로 데려가서 실컷 보시라고 해.”
양대은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회장님께 뭐라 하시지 못하니까 나한테 화풀이하는 것 좀 봐.’
하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명했다.
“회장님께서 두 분 정이라도 붙이시라고 사모님을 여기로 모셔가라고 하셨어요.”
“이 여자만 보면 화병이 날 것 같아.”
배선우가 무섭게 쏘아보자 성보람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한의학에서 그랬어요. 기가 통해야 혈액 순환이 잘 되고 온갖 병이 낫는다고.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더 커졌다는 건 혈액 순환이 더 잘 된다는 뜻이에요.”
양대은은 파르르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배선우가 뿜어내는 냉기에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사모님은 눈치도 없이...’
어제 배선우가 왜 병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옆 방으로 꺼져.”
배선우는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 위에 있던 컵을 성보람에게 던졌다.
성보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피했다.
“난 뭐 그쪽이 보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그녀는 캐리어를 들고 옆 방으로 가버렸다.
배선우는 손짓으로 양대은을 침대 가까이 부르고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쟤를 데리러 갔을 때 쟤 엄청 좋아했지?”
양대은은 목이 메었다.
“글... 글쎄요... 별로...”
“솔직하게 말해.”
배선우가 다그치자 양대은은 고개를 숙였다.
“좋아한 게 아니라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축 처졌는데요?”
“...”
배선우는 코웃음을 치면서 옷깃을 잡아당겼다.
“다 연기겠지.”
양대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망상증도 병인데 대표님만 모르셔.’
...
옆 방.
누가 재벌이 아니랄까 봐 병실마저 호텔 스위트룸처럼 화려했다. 성보람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휴게실을 골랐다.
어차피 배선우도 그녀를 보고 싶어 하지 않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라 아예 휴게실에 틀어박혀 논문을 쓰거나 게임을 했다.
배가 고프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목이 마르면 밀크티를 시켜 마셨다.
배선우는 요양하는 동안 배달원의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주문하신 치킨 배달 왔습니다. 주문하신 복숭아 밀크티 배달 왔습니다. 주문하신 두리안 피자 배달 왔습니다...”
배선우는 두리안 냄새를 정말 질색했다.
“성보람, 당장 이리 와.”
두리안 냄새에 그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런데 불러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