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배선우는 어쩔 수 없이 간병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서 데려와요.”
간병인은 자리를 비운 지 30초 만에 다시 돌아와 솔직하게 말했다.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존댓말을 쓰시면 그때 오시겠답니다.”
화가 난 배선우는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형 배혁수에게서 온 전화였다.
“병원이지? 네 형수랑 퇴근하고 갈게.”
“알았어.”
전화를 끊은 배선우는 실눈을 뜨고 간병인을 돌아보았다.
“내가 모셔오라고 했다고 해요.”
간병인이 성보람에게 말을 전하자 성보람도 꽤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배선우가 이렇게 예의 바르게 나오는데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손에 먹다 남은 두리안 피자 반 조각을 든 채로 배선우에게 갔다.
배선우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코를 막았다.
“누가 그런 걸 들고 오라고 했어? 당장 버려.”
“참 드실 줄 모르시네.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그래도 환자인 걸 생각해서 나머지 피자를 서둘러 입안에 쑤셔 넣었다.
음식을 잔뜩 넣어 볼이 빵빵해졌고 입가에 피자 부스러기까지 묻어 있는 모습이 살짝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냄새는...
배선우가 잘생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나한테서 좀 떨어져.”
“할 얘기나 어서 해요.”
성보람도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배선우가 말했다.
“이따가 우리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가 오시는데 인사도 드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알았어?”
“할 얘기라는 게 그거예요?”
성보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배선우 씨보다 훨씬 예의 바르니까.”
그러고는 다시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배선우는 순간 욱했지만 심호흡하고 싸늘하게 웃었다.
저녁 무렵 배혁수와 배혁수의 아내 조민주가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
“여기 앉으세요.”
배선우는 턱짓으로 자리를 가리키고는 성보람에게 인사를 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성보람은 이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전에 결혼식 때 이 사람들도 왔었다.
다만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도 성보람에게 친척들을 소개해주지 않았다.
성보람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작은아버님, 작은어머님.”
“푸흡...”
배혁수는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고 연신 기침했다.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이 남편의 등을 두드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배선우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쓴 바람에 입가에 매력적인 보조개 두 개가 드러났다.
늘 성보람 때문에 화가 났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꽤 괜찮았다.
성보람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 했다.
‘내가 잘못 불렀나? 이 두 사람이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라고 했잖아.’
배선우는 애써 웃음을 참고 일부러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무슨 헛소리야. 이 두 사람은 우리 형이랑 형수님이셔.”
“...”
그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의 눈빛 속에 숨겨진 섬뜩한 악의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뭔 남자가 이런 유치한 장난을 쳐? 어이가 없어서, 원.’
그녀는 억울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아까 선우 씨 작은아버님이랑 작은어머님이 오신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배선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호통쳤다.
“넌 생각이라는 게 없어? 우리 부모님이 딱 봐도 육칠십대 돼 보이시는데 마흔 살 넘은 형이 있는 게 이상해?”
성보람은 그제야 그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연기력 또한 아주 훌륭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미안해요, 여보. 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래요. 화내지 말아요.”
그러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에 배선우는 그녀가 연극영화과 출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울지 말아요. 괜찮아요. 별것도 아닌 일인데요, 뭐.”
배혁수는 피부가 하얗고 예쁜 어린 여자가 눈물을 흘리자 얼른 위로했다.
“선우는 우리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으신 늦둥이예요. 예전에 내가 학교에 데리러 가면 사람들이 다 나를 아버지로 알았다니까요?”
형수인 조민주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집오기 전에 배씨 가문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결혼을 너무... 급하게 해서 정말 몰랐어요.”
성보람은 훌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해명했다. 그러자 조민주가 코웃음을 쳤다.
“동서 어머니가 빨리 결혼시키자고 배씨 가문에 몇 번이나 재촉했었는지 얘기 안 하던가요?”
조민주가 말한 어머니는 성민서의 어머니였고 성보람은 그녀와 친하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성보람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입을 열면 실수만 할 테니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됐어. 제수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리잖아.”
배혁수가 옆에서 달랬다.
“그렇죠. 동서는 어리고 나만 늙었죠.”
조민주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쓰지 마. 네 형수 이젠 갱년기라서 그래.”
배혁수는 다정하게 말하고 나서야 아내를 뒤따라갔다.
병실에 드디어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성보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배선우를 매섭게 노려봤다.
“배선우 씨, 성별을 잘못 고른 것 같네요.”
“무슨 뜻이야?”
배선우가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절대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옛날 사극 드라마 같은 거 안 봤어요? 배선우 씨가 쓰는 수법을 보면 죄다 후궁 여자들이나 쓰는 거잖아요.”
성보람이 쏘아붙이자 배선우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지금 그를 독한 여자에 빗대어 욕하고 있었다.
“그게 내 탓이야? 네가 너무 멍청해서 내 말을 다 믿은 거지.”
배선우가 대놓고 비웃었다.
“밀크티랑 피자 같은 거 좀 그만 먹어. 그러니까 머리가 나빠지지. 머리가 좋아지게 호두나 많이 먹어.”
‘말하는 것 좀 봐. 뭔 말을 저렇게 모질고 독하게 해?’
화가 난 성보람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썹을 치켜세우던 배선우는 순간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보람이 두리안 피자를 가져와서 침대 옆에 앉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보, 이 피자 진짜 맛있어요. 먹어볼래요? 음, 너무 맛있어.”
두리안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배선우는 머리가 욱신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우웩.”
결국 성보람을 잡아채 그녀에게 토해버렸다.
“으악.”
병실에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