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잠시 후 배혁수가 퇴근하고 돌아왔다.
오늘 저녁 식탁은 유난히 풍성했다. 성보람이 전에 성씨 가문에서 살 때도 나름 잘 먹었었는데 배씨 가문에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성보람은 감히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먼저 배정헌과 김미경이 도우미가 가져다준 뜨거운 수건으로 손을 닦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도 따라서 손을 닦은 후 국을 떴다.
그녀는 항상 식사 전에 국을 먼저 먹는 편이었다. 대체 무엇으로 끓였는지 참으로 감칠맛이 뛰어났다.
조민주는 성보람이 국을 먹는 모습을 힐끗 보고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사람은 국을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금방 퇴원한 남편한테 한 그릇 떠주는 것도 모른단 말이죠. 하긴. 평소 이렇게 귀한 흑염소탕을 구경도 못 했을 텐데 이해는 돼요.”
그러면서 한 그릇을 떠서 남편 앞에 놓았다.
단 몇 마디에 성보람은 현명하지 못하고 이기적이며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김미경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배선우는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성보람을 지켜보았다.
“그러게요. 아내 노릇을 제대로 할지나 모르겠어요. 형수님의 반만이라도 내조를 잘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성보람은 차분하게 국을 삼키고 말했다.
“형님은 아주버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당연하죠. 나랑 혁수 씨는 예전에 유학도 같이 갔었어요.”
조민주는 휴지로 입가를 우아하게 닦았다.
성보람이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은 아주버님을 사랑하시니까 잘해주시는 거고 전 선우 씨한테 마음이 없으니까 저만 챙기는 거예요.”
식탁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배선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미묘한 눈빛으로 성보람을 쳐다보았다.
조민주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서방님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알아요? 어린 나이에 이미 시가 수조 원에 달하는 상장 회사를 책임지고 있고 게다가 외모도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어요. 밖에 얼마나 많은 재벌 집 딸들이 서방님을 쫓아다니는지 모르죠? 동서가 운이 없었더라면 서방님 같은 사람한테 시집올 자격이 있었을까요? 그러니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말아요.”
김미경 역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보람이 결혼해준 덕에 아들이 깨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들을 더 걱정했다.
“선우 씨가 참 훌륭한 사람인 건 맞죠.”
성보람도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많고 잘생긴 건 인정해요. 하지만 이런 조건들을 갖췄다고 해서 제가 반드시 선우 씨를 사랑해야 하나요? 그럼 전 선우 씨의 돈을 사랑하는 걸까요, 외모를 사랑하는 걸까요? 죄송한데 저는 속물이 아니에요.”
조민주는 말문이 막혀버렸고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예전에 서방님을 좋아했던 재벌가 딸들은 속물이고 동서만 고상하단 말이에요?”
김미경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배선우는 그녀가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라 아주 끔찍이 아꼈다.
‘성보람 쟤는 왜 말을 저따위로 하는 거야?’
“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조민주가 무섭게 쏘아붙여도 성보람은 검은 눈을 깜빡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전 선우 씨와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전에도 몰랐던 사람이에요. 결혼했다는 이유로 죽도록 사랑해야 하나요? 그건 너무 가식적이잖아요.”
맞는 말이었지만 맨날 아첨하는 소리만 듣고 사는 재벌들에게는 너무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김미경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자 조민주가 바로 쏘아붙이려 했다.
“동서...”
그때 배정헌이 끼어들었다.
“됐어. 그만들 해. 민주야, 보람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이 아이는 참 솔직해서 마음에 들어. 빙빙 돌리지도 않고.”
배정헌은 오늘 저녁에 성보람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벌써 두 번이나 했다.
성보람은 배선우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한 걸 알아챘다.
‘됐어.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배부터 채우고 보자.’
그녀는 순식간에 국 두 그릇을 비운 다음 밥도 한 공기 반이나 먹었다. 식사를 마친 조민주가 혐오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뭔 밥을 이렇게나 많이 먹어요?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어요.”
배혁수는 팔꿈치로 아내를 툭툭 치면서 말을 좀 줄이라고 눈치를 줬다. 그런데 조민주는 오히려 남편을 쏘아봤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성보람의 맑고 하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너무 많이 먹었나요? 죄송해요. 이 집에서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걸 몰랐어요.”
그러고는 서둘러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집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지만 배선우만 즐거워 보였다.
‘당신들이 억지로 결혼시킨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제대로 봐봐. 얘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치겠지? 내가 매일 어떻게 살았는지 다들 한 번 겪어봐.’
김미경이 어두운 목소리로 나무랐다.
“누가 이 집에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 보람아, 말 함부로 해선 안 돼.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가 널 박대한다고 오해하겠어.”
“화내지 마세요, 어머님.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여자는 다 저래요.”
조민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앞으로 배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게 천천히 가르치면 돼요.”
성보람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많이 먹어도 뭐라 하시고 앞으로 적게 먹겠다고 하니까 또 나무라시고. 대체 저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그녀는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민주는 평소 딸이 자주 욕하던 여우가 바로 이런 여자를 가리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배정헌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이젠 밥을 먹는 것까지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야? 우리 집에 뭐 쌀이 없어?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사람들 앞에서 혼난 김미경과 조민주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특히 조민주는 배씨 가문에 시집온 지 여러 해 되었지만 식탁에서 시아버지에게 공개적으로 혼난 건 처음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뛰쳐 갔다.
“제수씨, 형님한테 대들면 안 되죠.”
배혁수는 아내를 달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다 먹었어요.”
내내 구경만 하던 배선우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성보람을 힐끗 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버님, 어머님, 선우 씨한테 가볼게요.”
성보람은 인사를 마친 뒤 그를 쫓아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홀로 시부모와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녀를 쳐다보는 시어머니의 눈빛이 매우 좋지 않았다.
김미경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툴툴거렸다.
“성씨 가문에서는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저 모양이래요?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한테 따박따박 대들고 또 가식이나 떨고. 선우랑 정말 어울리지 않아요.”
“뭔 가식을 떨었다고 그래? 꼬투리 잡은 건 당신이지.”
배정헌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젊은이들이 잘 먹는 건 복이야. 설마 당신 아들이 밥을 반 공기도 안 먹고 종일 다이어트만 생각하는 비쩍 마른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그런 여자가 아이나 잘 낳을 수 있겠어?”
그의 말에 김미경은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
2층.
성보람은 배선우의 뒤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에 들어와 본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에는 급하게 배선우를 병원에 데리고 간 바람에 제대로 둘러볼 틈이 없었다.
해서 이번에 조금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배선우가 싸늘하게 웃었다.
“성보람, 생각보다 연기 잘하는데?”
“난 연기한 적 없는데요? 전부 사실대로 말한 거예요.”
성보람이 작은 얼굴을 들고 말했다.
“재벌들은 원래 다 이렇게 속이 좁아요? 어쩜 밥도 배불리 못 먹게 해요?”
그 말에 배선우는 창피함이 밀려왔다. 아까는 구경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었는데 이젠 불똥이 그에게 튀자 몹시 화가 났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많이 먹으라고 했어? 돼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