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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동궁의 그림자

경성의 귀한 규수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었다. 태자 김서준은 봄바람처럼 맑고 옥처럼 깔끔해서 수많은 규수의 꿈이었다. 하지만 밤이 내리면 김서준은 비밀 통로로 불러들인 안소민을 침상에 눌러 거듭 탐하는 광기의 얼굴을 아는 이는 없었다. 천일에 하루를 더한 밀회 끝에 어지럽게 구겨진 비단 이불 위에 누운 안소민은 겨우 용기를 모아 입을 열었다. “전하, 보름 뒤에 언니를 동궁으로 맞아들이신다고 들었습니다.” 안소민이 이불 끝을 꼭 쥔 손끝이 떨렸고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날에 소녀도 첩으로 들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리띠를 매던 김서준의 손이 멈췄다. “안 된다.” 김서준이 몸을 돌리자, 등불 아래 드러난 준수한 얼굴이 더욱 차갑게 보였다. “나는 지연에게 약조하였다. 이번 생에 오직 안지연 한 사람뿐, 다른 첩은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노라.” 그러자 안소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렇다면... 소녀는 무엇이옵니까?” 안소민의 떨리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평생 이렇게... 빛도 못 본 채 살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쩌겠다는 거냐?” 김서준이 비웃음 어린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살을 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안소민, 네가 바라는 자리가 무엇이냐.” 김서준이 몸을 굽혀 엄지로 안소민의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나는 이생에 안지연만을 사랑하겠다 하였노라. 다만 네 몸은 참으로 마음에 든다. 명분과 총애만 빼고, 다른 것은 다 주겠다. 지연과 혼례를 올린 뒤에도 너와 나는 비밀 통로로 만나면 된다.” 김서준의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다만 명심하라. 우리 일로 지연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마라. 지연이가 한 치라도 알게 되면... 너한테 무슨 일이 따를지 너도 알 것이다.”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과 놀라움이 안소민의 눈에 번졌다. 김서준은 처음부터 안소민에게 명분을 줄 뜻이 없었다. 김서준의 마음속에서 안소민은 빛을 보지 못하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김서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안소민은 떨리는 어깨를 다잡으려 해도 생각은 제멋대로 과거로 흘렀다. 안소민은 안국 공부의 서녀였고 안지연은 높은 자리의 적녀였다. 어릴 적부터 둘은 무엇이든 극명히 달랐다. 안지연은 으뜸가는 비단을 걸치고 가장 정교한 장신구를 썼다. 글 선생도 늘 안지연의 영특함을 칭찬했다. 반면 안소민은 언제나 어두운 곳에 서서 언니가 버린 옷을 입고 가장 평범한 먹과 붓을 썼다. 경성 규수들이 모두 꿈꾸는 태자 또한 오직 안지연에게만 마음을 주었다. 삼 년 전, 김서준은 대신들 앞에서 이생에 오직 안지연 한 사람뿐이고 첩은 들이지 않겠다고 공개 서약했다. 그날의 성대한 풍경은 아직도 경성의 화젯거리였다. 그 비 오는 그날 밤 이후로 모든 게 변했다. 그날 누군가는 김서준에게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했다. 게다가 김서준은 안소민을 안지연으로 착각해 몸을 섞었다. 안소민은 이 일 때문에 다음 날 목숨을 잃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차가웠던 태자 김서준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비밀 통로를 놓고 밤마다 안소민을 동궁으로 불러들였다. 꼬박 삼 년 동안, 월사의 며칠을 빼고는 거의 매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늘 절제하던 김서준이 안소민의 품에서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누구에게나 냉담하던 태자가 침상 위에서는 안소민의 몸을 거침없이 탐했다. 안소민은 이토록 가까운 사이면 마음도 조금은 나눴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가씨, 약 드실 시각입니다.” 한 상궁이 약사발을 들고 들어오며 생각을 끊었다. 안소민이 떨리는 손으로 그릇을 받았고 코끝을 찌르는 쓴 냄새에 목이 막혔다. 문밖에서 하녀가 다급히 속삭였다. “상궁마마, 서두르시옵소서. 시각이 지났사옵니다. 아가씨의 피임 탕...” 끝맺기도 전에 한 상궁이 매섭게 꾸짖었다. “입에 재갈을 물려야겠느냐!” 그러던 찰나, 안소민의 손에서 약그릇이 쾅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피임 탕?” 안소민의 믿기지 않는 목소리가 터졌다. “내가 그동안 마신 것이... 모두 피임 탕이였느냐?” 한 상궁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분부이옵니다.” 안소민은 누군가가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삼 년 내내, 김서준은 전혀 아이를 가질 뜻이 없었다. 그런데도 안소민은 어리석게도 피임 탕을 보약이라 믿었다니. 안소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새로 달인 약사발을 들어 단숨에 넘겼다. 약맛은 사무치게 썼으나 가슴의 쓰라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밀 통로를 따라 안국 공부로 돌아올 때, 안소민은 발걸음이 허공을 디디는 듯했다. “소민아, 이리 오너라.” 마침 마주친 박서희가 환히 웃으며 손을 잡았다. “변방의 신지운 장군님께서 중매를 들라 하셨다!” 박서희가 안소민의 손을 꼭 쥐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서녀라 큰 아씨와는 다르다. 장군은 멀리 변방에 있어도 용모가 준수하고 인품이 귀한 분이시다. 어미가 너를 위해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혼사다.” 그제야 박서희의 관자놀이에 돋은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안소민의 마음이 시큰해졌다. 김서준의 이름을 바라며 혼사를 몇이나 밀어냈던 세월 때문에 어머니의 근심이 머리를 희게 물들였다. “좋습니다.” 안소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집가겠습니다.” “좋다!” 박서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중매부터 잡자꾸나. 마침 너 언니가 보름 뒤 동궁으로 가니, 같은 날로 하여 두 집에 경사를 맞이하겠다!” 안소민이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대답하면서 박서희를 안국공부 밖으로 모셨다. 박서희가 안국공부로 돌아오자 동궁에서 보낸 혼례 예물이 상자째로 안국공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큰아씨를 참으로 아끼시지!” “이 비단은 강남에서 굳이 실어 왔다더라. 큰아씨의 혼례 옷을 짓겠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전하 말씀이 큰아씨는 가장 좋은 것만 받아야 한다시더라!” 사람들이 말들이 칼날이 되어 안소민의 가슴을 베었다. 발길을 돌려 작은 뜰로 가려던 찰나, 안소민은 누군가의 발끝을 밟았다. 안지연이 비명을 지르더니 팔을 휘두르며 안소민의 뺨을 후려쳤다. “눈이 없느냐! 감히 내 새 신을 더럽혀 놓다니... 전하께서 막 보내신 비단 신이거늘!” 안소민이 급히 허리 숙여 사과했다. “언니,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사과가 무슨 소용이냐?” 안지연이 턱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서녀인 주제에, 네 어미처럼 상석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그 순간, 줄곧 참아 온 서러움이 폭발한 안소민은 처음으로 맞받았다. “언니,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저를 탓하실 수는 있어도 제 어머니가 욕되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안소민의 말에 문득 사방이 고요해졌다. 표정이 굳어진 안지연은 시선을 따라 안소민더러 뒤를 돌아보라 눈짓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김서준이 매서운 눈빛으로 마루에 서 있었다. 김서준은 안소민을 스쳐 지나가 안지연의 차가운 손을 잡고 입김으로 덥혔다. “이 추운 날에 바람 앞에 서 있으면 어찌하겠느냐.” 안지연은 방금의 오만을 감추고 곧장 여리게 매달렸다. “전하, 소민이 제 새 신을 밟아 더럽혔습니다. 제가 두어 마디 꾸짖었더니, 감히 말대꾸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다면 더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김서준은 무심하게 대답했고 마침내 안소민을 훑어보더니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언니에게 무례하게 굴고 말을 함부로 했으니 두 시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라.” 그러자 안지연은 화사하게 피어난 꽃처럼 활짝 웃으며 김서준의 팔에 매달렸다. “전하, 역시 너그러우십니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 안소민은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얇은 옷자락은 녹아드는 물기에 흠뻑 젖었다. 무릎에서 시작된 냉기가 온몸으로 퍼졌으나, 마음속의 냉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두 시진 뒤, 시녀 청도가 눈가를 붉힌 채 달려와 부축했다. “아가씨, 어서 일어서시옵소서. 무릎이 상하시겠사옵니다!” 안소민은 다리에 이미 감각이 사라졌기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청도가 안소민의 무릎을 주무르며 흐느꼈다. “하늘은 참으로 무심하옵니다. 큰아씨는 적녀라 뭐든 다 가지시고 심지어 태자 전하마저...” “그만해라.” 안소민이 쉬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청도를 막았다. “아가씨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사옵니까.” 청도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분명 큰아씨가 먼저 손을 댔고 전하께서도 보셨사온데... 왜 벌은 아가씨 몫이옵니까. 너무나 부당하옵니다.” 안소민은 동궁이 있는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처량하여 청도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래. 너무 불공평하구나. 허나 이제 다투지 않을 거야.’ 안소민은 오직 혼례가 하루라도 앞당겨져, 경성을 떠나 다신 안지연과 김서준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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