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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향낭의 비밀

김서준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스쳤고 박서희는 흠칫 놀라 안소민을 끌어 무릎을 꿇리려 했다. 안소민이 먼저 몸을 숙이며 아픔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언니의 혼사를 두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김서준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 모녀를 훑어보았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안지연을 품에 안은 채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박서희는 서둘러 안소민을 작은 뜰로 부축해 데려갔다. 등불 아래, 상처를 살피며 약을 바르던 손이 자꾸 떨렸고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소민아, 너는... 어미를 원망하느냐? 이렇게 너를 먼 곳으로 억지로 시집보내려 하니...” 안소민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원망하겠습니까. 제가 스스로 원한 혼사입니다.” “정말이냐?” 박서희의 손길이 멈췄다. “정녕... 마음에 두었던 그 사람은 내려놓았느냐?” 그 말에 안소민은 어깨가 굳었다. 3년 전, 혼사를 재촉받지 않으려고 안소민은 붉어진 얼굴로 마음에 둔 이가 있다며 곧 자신을 데리러 온다고 말했고 어머니에게 말했었다. 박서희도 그 말을 믿어 주었기에 3년이라는 시간을 미뤄두었다. “어머니.” 안소민이 애써 웃었다.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가 지어낸 말이었습니다.” 박서희의 손에서 약사발이 미끄러질 뻔했다. “뭐라는 거냐?” “어머니 곁에 오래 있고 싶어 꾸며 낸 거짓이었습니다.” 안소민은 눈길을 떨구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흔들리는 촛불이 박서희의 눈물 자국을 더 또렷이 비추었다. 박서희가 떨리는 손으로 안소민의 뺨을 만졌다. “어리석은 계집 같으니라고, 진실이든 아니든,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다.” “네, 다 지났습니다.” 안소민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한바탕 꿈이었을 뿐이니 이제 깨어나야지요.” 박서희는 안소민이 아이였을 때처럼 감싸안아 토닥였다. “변방에 가거든 마음 놓고 살거라. 신지운 장군님은 좋은 사내다. 너를 잘 보살펴 줄 것이다.” 안소민은 박서희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 가득 김서준을 품고 살던 안소민은 그날로 완전히 죽었다. 이제부터는 변방의 장군 부인일 뿐이지 경성의 김서준과는 인연을 끊고 살 것이다. 그 뒤로 안소민은 집에서 혼례를 준비했다. 정월 보름날, 안소민은 하는 수 없이 집안 자매들과 함께 구공주의 매화 잔치에 나갔다. 매화원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자리에 막 앉자마자 김서준이 안지연의 손을 이끌고 천천히 들어왔다. 금빛 비단이 김서준의 선이 고운 얼굴을 더 차갑게 돋보이게 했고, 붉은 망토의 안지연은 만개한 붉은 매화꽃처럼 눈부셨다. “전하께서 큰아씨를 참으로 세심히 챙기시지.” 옆자리 규수들이 속삭였다. “비녀도 전하께서 직접 꽂아 주셨다더라.” “어릴 적부터 서로만 보고 자랐다니... 참 부럽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전하의 그 지극한 정성은 훗날까지 전해지겠구나.” 안소민은 온기가 도는 차를 홀짝였으나 얼어붙은 손끝을 데우지는 못했다. “아유, 들으니 낯이 뜨겁네요.” 안지연이 수줍은 듯 일어나며 웃었다. “매화를 보러 가겠어요.” 김서준이 즉시 어깨에 덮을 망토를 풀었다. 몸을 굽히는 순간, 소매 속에서 정교한 향낭 하나가 톡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구공주가 잽싸게 집어 들었다. “이건 지연이가 수놓은 것이냐?” 구공주가 장난스레 웃었다. “오라버니가 몸에서 떼지도 못하고 지니고 계시네. 숨 쉬듯 붙어 다니는 모양이야.” 안소민의 손에 들린 찻잔이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3년 전, 자신이 김서준에게 건넸던 바로 그 향낭이었다. 그 안에는 안소민의 작은 초상이 들어 있었다. 김서준은 그때 다른 건 모두 거절하면서 유일하게 이 향낭만 남겼다. 그 한 가지로 안소민은 김서준의 마음에도 자신이 조금은 들어 있다고 믿어 버렸다. “오라버니,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열어 볼래요.” 구공주가 흥이 붙어 매듭을 풀려 했다. 안소민이 벌떡 일어서며 떨리는 목소리가 터졌다.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잔치에 참가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그제야 자신이 도를 넘었음을 알아차린 안소민이 급히 말을 이었다. “이런 향낭은 함부로 열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인연을 어지럽힌다고 했습니다.” 안소민은 시선으로라도 불태워 없애려는 듯 향낭을 노려보았다. 그 안의 작은 초상만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허튼소리!” 구공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라버니와 지연이는 하늘이 맺은 한 쌍이고 이미 혼약까지 했다. 이 인연은 신선이 와도 못 건드릴 테다.” 안소민의 눈길이 본능처럼 김서준을 찾았다. 간절한 구원이 담긴 눈빛이었으나 김서준의 표정은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는 것처럼 사무치게 담담했다. 매듭이 풀려 향낭이 열리려는 찰나, 안소민은 절망스럽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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