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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혈서와 혼례

김서준이 미간을 좁히고 침상 위에 쓰러진 안지연을 한 번 훑어본 뒤, 성가신 듯 낮게 말했다. “알겠다.” 노어의가 곧바로 은칼을 받들어 올렸다. 안소민이 그것을 받아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칼끝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날이 살을 가르는 순간, 앞이 새까맣게 캄캄해졌다. 안소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선혈이 은칼을 타고 옥그릇으로 똑똑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안소민은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득한 틈에 어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아씨께서 깨어나셨사옵니다!” 김서준이 곧장 침상 앞으로 달려가 안지연을 끌어안았다. “지연아, 드디어 눈을 떴구나...” 그와 동시에, 안소민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남은 기력을 긁어모아 손가락 끝을 깨물고 새하얀 비단 수건 위에 피로 글자를 그었다. “김서준은 안소민의 혼가를 자유롭게 허락하며, 이후 어떠한 방식으로도 안소민 또는 그 남편을 얽매거나 곤란케 하지 않겠노라.” 한 글자, 한 글자에 온 힘을 다해 쥐어짜니 피가 번지며 가슴처럼 아려 왔다. “소녀의 조건은 전하께서... 여기에 인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안소민이 떨리는 손으로 혈서를 내밀었다. 김서준은 눈과 마음을 온통 안지연에게 빼앗긴 채, 내용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태자 인장을 꺼내 꽉 찍었다. “이제 만족하겠느냐?” 붉은 인장이 선명한 혈서를 손에 쥔 안소민은 눈가에 눈물 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거면 됐지... 모든 것이 마침내 끝났구나.’ 상처를 추스르는 동안, 안국공부는 날이면 날마다 떠들썩했다. 모두가 안지연의 혼례 채비로 분주했다. 안소민은 창가에 앉아 뜰의 배나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꽃잎은 이미 다 져 있었다. “아가씨, 이제 단장을 하셔야 하옵니다.” 눈가가 벌겋게 된 청도가 붉은 혼례복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 그제야 안소민은 깨달았다. 오늘은 자신의 혼례 날이자, 안지연이 동궁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저택 가득 걸린 등불과 비단은 모두 적녀의 대혼을 위한 것이고, 서녀의 원혼은 그저 곁문으로 조용히 가마가 나갈 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다. “전하께서 친히 십 리의 붉은 가마 행렬로 맞으러 오신다고 하옵니다.” 청도가 머리를 빗기며 속삭였다. “경성의 규수들이 모두 큰아씨를 부러워한답니다.” 안소민은 조용히 듣기만 했고 마음은 여전히 고요했다. 김서준을 향한 마음을 이미 내려놓았다. 막 혼례복으로 갈아입으려는 찰나, 바깥에서 북과 피리 소리, 폭죽 소리가 요란스레 터졌다. “전하께서 맞으러 오셨사옵니다!” 어린 하녀가 뛰어 들어왔다. “둘째 아가씨, 예법에 따라 전하께서 집안 자매들에게도 축하 예물을 내리신다고 하오니, 어서 나가 보시옵소서!” 안소민은 발걸음을 옮겨 대문 앞에 섰다. 붉은 혼례복을 차려입은 김서준이 준마에 올라 천천히 다가왔다. 입가에 번진 웃음, 미간과 눈꼬리에는 사랑하는 신부를 맞는 기쁨이 가득했다. 김서준은 자매들에게 차례로 예물을 내렸다. 모두에게는 비녀와 구슬, 보석이 들었는데, 유독 안소민의 비단 상자 속에는 문서 한 장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성 서쪽에 있는 별원의 지계였다. 안소민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올려다보니 김서준의 담담한 시선이 마주 닿았다. 그제야 며칠 전의 말이 떠올랐다. “혼례가 끝나면 다른 집을 마련해 너를 옮기겠다.” 안소민의 입가에는 쓸쓸한 웃음이 번졌다. ‘끝내 평생 나를 그늘 속에 숨겨 두겠다는 뜻이었구나.’ 그러나 안소민은 이제 예전처럼 휘둘릴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었다. 설령 훗날 김서준이 진상을 알고 노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소매 속에는 태자 인장이 찍힌 혈서가 있었다. 혼가 자유를 허락한다는 문구가 흰 종이 위에 분명히 남아 있으니 아무리 김서준이라고 해도 뒤집을 수 없었다. 안소민이 지계를 바라본 채 말없이 서 있자, 김서준은 기색이 수상함을 눈치채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가오려 했다. 마침 그때, 저택 안쪽에서 환성이 터졌다. 봉관과 화려한 예복을 갖춘 안지연이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김서준은 곧장 몸을 돌렸고 더는 다른 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과 눈빛이 온통 신부에게로 쏠렸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안소민은 고요히 서서 바라보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안소민은 흔들리는 불꽃 앞에 지계를 던졌다. 그러자 비단 문서가 서서히 잿더미로 변해 갔다. “아가씨, 이제 관을 올려야 하옵니다.” 울먹이는 청도가 봉관을 살며시 머리에 얹었다. 청동거울 속, 혼례복을 입은 안소민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안소민은 자신을 오래 붙잡아 두었던 저택을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먼 변방으로 가는 길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산은 높고 물길은 깊겠지. 지난 일들은 여기서 끊을 거야. 마음속 가득 김서준만을 품던 안소민도 이 겨울에 영영 묻어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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