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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하선우는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제 마음속에는 오직 설아 밖에 없어요.” “정말 그래요?” 강서진이 가늘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런데 왜... 어젯밤에는 한 번으로 충분했을 텐데 선우 씨는 저를 계속... 여러 번이나 찾았을까요?” 강서진은 손끝으로 하선우의 가슴을 부드럽게 긁어내렸다. “아까 누가 저한테 혼담 들고 오니까, 선우 씨는 눈이 붉어진 거... 그거 질투 맞죠?” 하선우가 반박하려는 순간, 문가 어둑한 곳에 서 있는 민설아가 눈에 들어왔다. 하선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얘졌다. “설아야? 언제... 언제 일어난 거야? 뭘 들었어?” “방금 일어났어.” 민설아의 목소리는 너무도 담담했다. “내가 뭘 들었어야 하는데?” 그 말에 하선우는 가슴을 쓸어내리듯 안도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별거 아냐. 먼저 씻고 있어. 내가 아침 차려줄게.” 식탁에서 민설아는 자신 앞에 놓인 두 그릇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민설아가 좋아하는 담백한 죽과 반찬,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소에 절대 먹지 않는 매운 고추장 비빔면이었다. 강서진은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비빔면을 먹고 있었다. 민설아는 가슴이 바늘로 찔린 듯 쓰라렸다. 하선우가 민설아를 따라다니며 매일 직접 밥을 해 주던 날들이 떠올랐다. “넌 위가 약하니까 꼭 시간 지켜서 밥을 챙겨 먹어야 해.” “설아야, 난 평생 너한테만 요리해 줄 거야.” 그 모든 약속이 이제는 다른 여자를 위해 차려진 식탁 앞에서 산산이 깨져버렸다. 식사가 끝난 뒤, 하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아야, 요즘 새 옷 안 산 지 좀 된 것 같더라. 오늘 휴가니까... 같이 백화점 갈까?” 하선우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다정했다. 그러자 강서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잘됐네요. 저도 옷 좀 사야 했는데. 같이 가요!” 하선우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화점의 조명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하선우는 민설아의 옆에서 천천히 옷을 골라 주었다. 하선우는 하늘색 원피스를 들어 민설아에게 대보며 말했다. “이거 잘 어울리네. 포장해 주세요.” 점원은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 대령님, 부인분한테 정말 잘해 주시네요. 한 번에 이렇게 옷을 많이 사 주는 분은 처음 봐요.” 말없이 새 옷을 내려다보던 민설아는 기쁨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강서진이 양팔 가득 옷을 들고 다가왔다.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점원이 계산을 마치고 말했다. “총 8,000만 원입니다.” 강서진은 지갑을 뒤지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깎아 주면 안 될까요? 돈이 모자라네요.” “최저가예요. 그렇지 않으면... 한두 벌 줄이시는 게...” “안 돼요!” 강서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 꼭 필요한 거예요. 하나도 뺄 수 없어요.” 하선우가 다가와 물었다. “얼마나 더 필요해요?” “3,600만 원이요.” 그 숫자를 듣는 순간, 하선우의 표정이 굳었다. 그 금액은 조금 전 민설아에게 사 주려던 옷값과 똑같은 액수였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민설아는 움찔하는 하선우의 어깨를 보며 손바닥 깊숙이 손톱을 박아 넣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마침내 하선우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까 그 옷들은 일단 포장하지 말자.” 그리고 점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서진 씨가 고른 옷들만 계산해 주세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강서진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하선우는 민설아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아야... 형수님은 혼자라서 더 챙겨야 해. 네가 이해해 줘.” 민설아는 그러는 하선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예전에 하선우는 강서진처럼 제멋대로이고 투정 많은 여자를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었다. 절대 어울릴 수 없는 타입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지금 하선우는 그런 여자를 위해 아내에게 사주기 위한 옷까지 모두 포기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민설아는 가슴 한복판이 저릿하게 아팠다. ‘하선우는... 정말 나를 버릴 만큼 철저하구나.’ 백화점 밖. 석양이 기울어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하선우는 강서진의 쇼핑백을 한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을 뻗어 민설아와 손을 잡으려 했지만 민설아는 알아차린 듯 자연스럽게 피해 갔다. “설아야...” 하선우는 조심스레 달래듯 말했다. “다음 달에 월급 들어오면 다시 사 줄게.” 하지만 민설아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선우의 다정함이 죄책감에서 비롯됐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으악!” 강서진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스쳐 지나가면서 강서진의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통째로 낚아챘다. “내 목걸이!” 강서진은 충격도 아랑곳없이 달려 나가려 하자 하선우는 강서진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위험하니 따라가지 마세요. 목걸이는 다시 사면 돼요!” “안 돼요!” 강서진은 울먹이며 외쳤다. “저건 준성 오빠가 저한테 준 약혼 목걸이예요. 안에... 우리 둘이 찍은 마지막 사진이 들어 있다고요!” 말을 끝내자마자 강서진은 하선우의 손을 뿌리치고 도로 쪽으로 뛰어들었다. “형수님!” 하선우가 뒤에서 소리쳤지만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브레이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대형 트럭 한 대가 강서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전광석화 같은 순간, 하선우는 민설아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뛰어나갔다. 그리고 강서진을 밀쳐냈다. “쾅!” 묵직한 충돌음이 공기를 찢어 놓았다. 민설아는 눈앞에서 하선우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가 바닥으로 내던져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의 피가 아스팔트 위를 순식간에 붉게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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