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못생기지 않았을 거라 짐작했지만 얼굴을 본 순간 어떻게 남자의 이목구비가 이리도 섬세하고 완벽한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소이현은 잘생긴 남자를 처음 본 게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녀를 감탄하게 만든 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눈앞의 이 남자였다.
3년 전 소이현과 강도훈이 가족들만 모인 결혼식을 올릴 때 이 남자가 나타났었다.
그의 이름은 권승준, 강도훈의 배다른 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소이현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외모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기운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권승준은 더욱 진중해졌고 전보다 속내를 더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심플한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인데도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이현은 잠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에서 권승준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여진성이 소개했다.
“대표님, 이쪽은 제 초등학교 동창 박지연, 그리고 이쪽은 지연이의 친구 소이현 씨입니다. 모두 과학기술 분야 인재입니다.”
이어서 그녀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권승준 대표님이십니다. 저희 회사 대표님이시고요.”
권승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박지연은 누구를 만나든 당황하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권승준을 보고는 몇 초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그 후로도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때 권승준이 소이현을 쳐다봤다. 압박감이 느껴지는 눈빛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소이현은 이 예상치 못한 만남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별다른 표정 없이 악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권승준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머물렀다.
소이현은 권승준이 갑자기 강도훈의 얘기를 꺼낼까 봐 걱정했다. 어쨌거나 그의 눈에 그녀는 남이 아닌 제수였으니까.
다행히 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3년 전 결혼식에서도 권승준은 그녀와 강도훈에게 축하한다는 말만 하고는 들고 있던 잔의 술을 마신 후 일찍 자리를 떴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만남이었다.
소이현은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손바닥에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거두어들였다.
상상했던 난감한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소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권승준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억제된 힘이 숨어 있다는 걸 포착했다.
박지연은 서울권의 거물인 권승준을 만나러 왔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위로 올라가려면 사교가 필수이긴 하나 한 번에 너무 큰 도약을 시도해서는 안 되었다.
박지연은 우선 여진성과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소이현은 관람석으로 가서 경기를 구경했다. 대형 스크린에 선수 정보가 나왔고 하연서가 1번 레인에 있었다.
경기가 시작된 순간 경기장이 귀청이 터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관중들은 좋아하는 선수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중계 카메라가 선수들의 클로즈업을 잡았는데 마침 대형 스크린에 헬멧을 쓴 하연서가 나타났다. 눈매만 보였지만 경기에 무척 집중하고 있는 게 보였고 민첩한 손동작과 어우러져 매우 매력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사람들이 왜 그녀에게 환호하는지 이해가 갔다.
소이현은 망원경으로 경기장을 봤다. 그러다 우연히 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관중석인 첫 줄에 시선이 닿았다.
강지유가 하연서를 목청껏 응원하고 있었다.
레이싱카가 앞을 지나갈 때면 제자리에서 뛰면서 무척이나 흥분했다.
귀하게 자란 강지유가 언제 이렇게 누군가를 열렬히 숭배하고 좋아한 적이 있었겠는가? 항상 높은 자리에 서서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녀였다.
그녀 옆에 재력이 상당해 보이는 인물들과 강도훈의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하연서를 응원하고 있었다.
소이현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하연서를 일부러 찾으려 한 게 아닌데 망원경을 돌리자마자 하연서가 잡혔다.
잠깐 멈칫했다가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하연서의 옷깃 사이에서 튀어나온 백합 목걸이를 보고 말았다.
생일날 우연히 만났을 때 강도훈이 하연서를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백합 목걸이를 맞춤 제작했다고 고태훈이 말했었다. 단지 하연서가 백합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오늘 그 목걸이를 하고 경기에 나갔다.
소이현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강도훈은 하연서의 취향을 묵묵히 기억해뒀다가 그녀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갑자기 경기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런데 VVVIP 룸의 시야가 너무 좋았던 탓에 아래쪽 VIP 관람석까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순간 강도훈이 보였다.
강도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짓만 봐도 지금 경기에 아주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명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소이현은 지난 몇 년간 강도훈의 뒷모습을 좇으며 그때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지옥에서 끌어낸 그녀를 안아줬던 넓고 따뜻한 품에 다시 한번 안기기를 갈망했다.
하여 그의 마음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었다.
3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것도 어쩌면 자초한 일이라 억울할 게 없었다.
소이현이 참지 못하고 심호흡했는데도 마음속의 씁쓸함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다.
경기를 볼 기분이 아니었던 소이현은 룸으로 돌아왔다. 주의를 돌리려고 오락 시설들을 만지작거렸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그녀라 금세 능숙해졌다.
박지연은 소이현이 룸으로 돌아간 걸 보자마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깨닫고 여진성에게 얘기한 후 룸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소이현의 옆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비교조차 안 되긴 하지만 네가 경기에 나갔더라면 하연서보다 만 배는 더 멋있을 거야.”
“고마워. 위로해줘서.”
“기분 좀 나아졌어?”
소이현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감을 얻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나저나 박지연의 이 한마디 위로가 현재의 좌절감을 씻어준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인천의 최고 부자인 서현석이 권승준과 함께 실내로 들어왔다.
여진성에게 들었는데 오늘은 서현석이 권승준을 레이싱 경기에 초대한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거의 30살 가까이 났지만 서현석은 항상 예의와 존중을 표했다. 이것만 봐도 권승준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표님, 오늘 참석한 선수 중에 좋아하는 선수가 있나요?”
그 모습에 소이현과 박지연은 조용히 한쪽으로 비켜섰다.
권승준이 테이블 위의 샴페인 잔을 들자 서현석이 즉시 다른 잔을 들고 건배했다.
샴페인을 살짝 맛본 후 권승준이 답했다.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 대표님도 한때 레이싱에 큰 관심을 보이셨다면서요? 마침 제 아들 녀석도 좋아해서 레이싱 대회에 관한 소식을 많이 들었는데 정말 재미있고 자극적이더라고요. 혹시 특별히 눈여겨보는 선수가 있으신가요? 있다면 앞으로 그 선수가 경기에 나갈 때마다 대표님을 초대하도록 할게요.”
“있기는 합니다.”
소이현과 박지연도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서현석이 말했다.
“누군지 여쭤봐도 될까요?”
권승준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썬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