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강도훈이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카페 입구에 나타났다. 모델 뺨치는 큰 키와 탄탄한 몸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카페 안의 손님들이 그를 힐끗거렸는데 눈빛에 감탄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30대 초반쯤 돼 보였고 그 역시 분위기가 남달랐다.
소이현은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한국과학기술원 컴퓨터공학과 교수 송도준이었는데 포럼을 둘러보다가 요즘 AI 데이터 기반 안정성을 연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 뒤에 강도훈의 비서 허재윤이 서류를 안은 채 서 있었다.
강진 그룹은 인천의 과학 기술 업계에서 1위를 달리는 기업이었다. 송도준과 만난 건 아무래도 일 때문일 것이다.
소이현은 강도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 일어나면 더 눈에 띌 게 뻔했기에 그녀를 못 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강도훈의 시선이 정확히 소이현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강도훈은 낯선 사람을 보는 듯했다. 눈빛에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고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녀가 그곳에 있든 없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허재윤의 시선도 그를 따라 소이현에게 향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대표님, 이쪽입니다.”
그런데 소이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때 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송도준이 갑자기 물었다.
“대표님, 창가에 앉은 저분 아시는 분인가요? 아까 두 분이 저쪽을 보는 것 같던데.”
강도훈은 소이현이 회사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지,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만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도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건성건성 답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예요.”
송도준이 살짝 멈칫했다.
강도훈이 누군가에게 신경을 써서 물었던 게 아니라 예전에 한국과학기술원의 연구실에서 그녀를 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국과학기술원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대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도우미로 일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봤던 그 학생은 천재 중의 천재였다. 지금 송도준의 연구실이 기술적인 어려움에 맞닥뜨렸는데 그런 인재가 들어온다면 짧은 시간 안에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몇 년 전에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졸업생 명단을 다 뒤져봤지만 그 천재만 한 학생이 없었다.
송도준은 그 학생의 실력이라면 논문 몇 편만 발표해도 학계가 발칵 뒤집히고 한국과학기술원의 최연소 교수도 거뜬히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과학 연구원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했던 학생이었다.
송도준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잘못 본 거라면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가시죠, 대표님.”
강도훈은 소이현을 더는 거들떠보지 않고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소이현이 손톱으로 커피잔을 긁은 바람에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예전에 고태훈이 집에 놀러 와서 소이현이 만든 음식을 먹고는 기절할 듯이 놀라며 나중에 그녀처럼 요리 잘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떠들어댄 적이 있었다.
그때 강도훈이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요리사랑 결혼하면 되겠네.”
사랑에 빠지면 정말 바보가 되는 걸까?
그때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고 가소로웠다.
3년을 바쳐서 얻은 게 고작 요리사와 도우미라는 신분이라니.
소이현은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팠다. 뒤늦게 깨달은 터라 가느다란 바늘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픔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똑똑.
강도훈이 룸으로 들어간 후 허재윤이 다가와 그녀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소이현이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허재윤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왜 왔어요? 대표님이 행방을 캐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하셨잖아요.”
예전에 강민호가 아팠을 때 강도훈이 연락이 되지 않아 소이현은 비서에게 연락했었다. 그러다가 술집에서 강도훈을 찾았다.
그때 강도훈은 만취 상태였다. 소이현이 부축하려는데 소파에 덮치듯 넘어뜨리고는 거칠게 입을 맞췄다.
소이현은 놀라면서도 기뻤다. 평소 그녀에게 차갑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먼저 키스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쁜 것도 잠시 그의 입에서 ‘연서’라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소이현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 후 정신을 차린 강도훈이 크게 화를 냈고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랬다간 무조건 이혼이라고, 강민호가 나서도 소용없다고 경고했다.
그 뒤로 소이현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도훈의 스케줄을 캐묻지 않았다.
비서인 허재윤은 소이현이 강도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녀에게 강도훈의 심기를 건드릴 배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무슨 배짱으로 따라왔지? 무슨 자극이라도 받았나?’
허재윤은 금세 알아챘다.
“만약 하연서 씨가 귀국한 일로 이런 실수를 한 거라면 그분이 대표님께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연서는 면접을 통해 송도준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송도준이 업계 거물이라 밑에 있는 연구원들도 모두 엘리트 인재들이었고 연구 주제는 인공지능 최첨단 응용 기술이었다.
하연서가 사는 세상은 소이현이 발도 못 붙일 곳이었다.
허재윤이 소이현의 입장이었다면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처신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연서를 봤을 때 둘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스스로가 더 초라해질 뿐이니까.
하지만 소이현은 그걸 깨닫지 못했다.
소이현과 허재윤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사실 딱히 이유도 없었다. 그저 대표의 태도대로 움직였기에 소이현을 대하는 그의 태도도 무척이나 싸늘했다.
소이현은 예전에 강도훈만 바라봤던 터라 허재윤이 아무리 쌀쌀맞게 굴어도 그냥 넘겼다. 그러나 이젠 참지 않을 것이다.
소이현이 되물었다.
“그럼 뭐가 의미 있는 거죠? 비서님의 논리대로라면 아침부터 따라다니고 그 사람이 뭘 하든 몰래 쫓아다니는 게 더 쉬운 거 아닌가요? 그러면 비서님이 말한 질투에 미쳐서 스토킹하는 여자처럼 보일 거고요.”
허재윤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항상 고개만 숙이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날카로워지다니.’
하지만 곧 이유를 깨달았다.
어제 소이현이 유산했는데도 강도훈은 계속 하연서와 함께 있었다. 자식을 잃은 여자라면 아무리 나약한 성격이라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기세도 며칠 못 갈 거라고 생각했다.
허재윤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전 소이현 씨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대표님께서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만 가세요.”
소이현이 가지 않고 버틴다면 그녀에게 좋을 게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유치하게 버틸 이유도 없었다.
“난 이미 그 사람이랑 이혼했어요. 앞으로 내가 뭘 하든 당신들이랑 상관없으니까 신경 꺼요.”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허재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왜 저래? 대표님이 이혼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지금까지 하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화내봤자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세게 나오고 싶으면 결혼반지라도 빼고 말하던가. 대놓고 거짓말이라니, 창피하지도 않나?’
...
소이현은 카페를 나온 후 박지연에게 전화했다.
“다른 데서 만나자.”
원래는 박지연을 만난 다음에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주얼리 매장.
점원이 소이현이 약지에 낀 반지를 잘랐다.
그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어머니가 주는 약을 이것저것 먹었더니 살이 쪄서 반지가 빠지지 않았다.
잘린 반지는 플래티넘 회수 시세로 계산해주겠다고 했다.
소이현이 화려한 걸 싫어해서 결혼반지도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로 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비싸지 않아 회수 금액이 40만 원도 안 됐다.
금액을 들은 박지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결혼반지까지 팔다니. 이번 연기는 진짜 같은데?”
지난 3년간 소이현이 하도 이랬다저랬다 번복했기에 박지연은 그녀가 강도훈과 절대 끝낼 리 없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