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4화

소이현은 반박하지 않고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약지의 반지 흔적을 보며 말했다. “이 자국 너무 보기 싫어. 진작에 뺐어야 했는데.” 그녀의 말에 박지연은 소이현이 이번에는 진심이라는 걸 짐작했다. 100%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현재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기에 더 이상 장난칠 게 없었지만 그래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너의 사랑은 나의 근사한 한 끼 식사보다 못해.” 소이현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박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눈썹을 치켜떴다. “내 시간이 얼마나 귀한데. 우선 왜 나를 찾았는지부터 말해봐. 너한테 시간을 쓸 가치가 있는지 들어보고 결정할게.” 소이현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전에 중단했던 논문을 다시 쓰려고 하는데 네 연구실의 데이터를 빌려도 될까?” 업계 변화가 너무 빨라서 많은 수정이 필요했다. 소이현이 전화로 얘기하지 못했던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박지연의 성격상 왜 진작에 하지 않았냐고 욕할 게 분명했다. 결혼하지 않은 박지연은 대학교 때 논문을 발표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박지연이 놀란 눈으로 소이현을 쳐다봤다. “갑자기?” “나 지금 진지해.” 박지연은 소이현을 뚫어지게 훑어봤다. 그녀는 계속 업계에 있었는데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송도준의 연구가 여러 과학 기술 기업의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현재 그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주요 문제점을 소이현이 이미 3년 전에 해결한 상태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완벽한 루기X 언어 모델이 그녀의 회사에 있었다. 소이현은 루기X 언어 모델의 유일한 개발자다. 그녀가 해결한 수많은 난제 중 아무거나 하나만 꺼내도 연구실 하나를 정체기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소이현은 박지연이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최고의 천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사랑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졌다. 갑자기 결혼하더니 지금은 차나 따라주는 비서가 됐다. 업계에서 연구를 이어가지 않고 재능을 낭비하는 그녀가 박지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3년이나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네 논문이 아직도 가치가 있을 거라고 확신해?” “수정해야지. 교수님 만나면 연구 방향을 확정하고 통과되면 계속 쓸 거야.” 물론 교수가 그녀를 만나준다는 전제 하에. 박지연이 말했다. “그럼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교수님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서 연구에만 몰두하시는 분이라 금방 나오시진 않을 거야.” “천천히 기다리지, 뭐.” 더 이상 강도훈이 그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젠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박지연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소이현이 몇 년간 업계를 떠났어도 그녀의 기술로는 어떤 조언도 해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천재들의 세계는 원래 남다르니까. 박지연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너랑 같이 밥 먹어줄게.” 박지연이 겉으로는 쌀쌀맞고 날카로워도 사실 속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소이현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이현이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 박 대표.” ... 고태훈은 한 시간 전에 사귀기로 한 인플루언서 여자친구와 쇼핑을 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다. 급하게 따라갔으나 이미 사라져버렸다. 아까 소이현이 들렀던 주얼리 가게에 들어가 여자친구에게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하면서 점원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듣다 보니 얼굴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강도훈, 감히 날 속여? 소이현이 아침 일찍 순순히 돌아가 수발을 들었다면 결혼반지를 팔았을 리가 있겠어?’ 잠시 생각하다가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저녁, 다들 한창 신나게 술을 마시던 그때 강도훈이 도착했다. 고태훈은 그를 보자마자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소이현이 갑자기 결혼반지를 팔아버린 건 또 무슨 수작일까?”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소이현을 비아냥거리곤 했다. 처음에는 강도훈이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기라도 하면 아무도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그의 눈치를 많이 봤으니까.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다. 강도훈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 앞에서 놀려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친구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도훈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한테 보여주려고 연기하는 거야.” 허재윤은 소이현이 카페에서 했던 말을 그에게 고스란히 전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허재윤과 마찬가지로 소이현이 충격을 받아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하여 결혼반지를 판 것도 또 다른 수작이라 확신했다. “연기? 정말 소이현이 할 법한 짓이네.” “그런데 이 수작이 도훈이한테는 안 먹히는데. 도훈이가 결혼한 후에도 결혼반지를 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고태훈이 약을 올렸다. “특별한 자리에서는 꼈어. 쟤 할아버지 앞에서는 안 낄 수가 없으니까.” 강도훈이 불쾌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고태훈이 마른기침하며 멋쩍게 말했다. “그래, 그래. 한 번도 낀 적이 없어. 됐지?” 강도훈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나아졌다. 고태훈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또 물었다. “나중에 보니까 소이현이 다른 주얼리 가게에도 갔더라고. 커플링을 새로 살 모양이던데 받으면 낄 거야?” 강도훈은 못 들은 척했다. 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두 눈에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항상 차갑고 금욕적인 타입이라 평소 다정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고태훈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하연서와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이 고태훈에게 향했을 땐 다시 싸늘해졌다. 강도훈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이따위 쓸모없는 얘기를 하려고 날 불렀어?” 고태훈은 소이현이 한 달 동에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강도훈이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무슨 난리를 치든 강도훈이 신경 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고 그들도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없게 된다. 고태훈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결과적으로 내가 이기진 못했지만 먼저 진 건 너니까 밥 사는 거 잊지 마.” 두 사람은 소이현이 언제 돌아올지에 대한 내기를 했었다. 강도훈이 흔쾌히 대답했다. “시간은 네가 정해.” “연서 곧 생일이니까 그날로 할까? 함께 보내고 좋잖아.” “말 안 해도 너희들을 초대할 생각이었어.” “벌써 계획 다 세워놨구나. 참 세심하다니까.” 신경 쓰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나 달랐다. 고태훈의 기억이 맞다면 소이현의 생일이 한 달 전이었다. 그날 강도훈은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셨다. 중간에 소이현이 전화 왔었는데 술에 취한 강도훈 대신 고태훈이 받았다. 그녀의 첫마디가 이러했다. “아직 바빠? 내 생일 다 지났어.” 그때 시간이 새벽 1시였다. 고태훈이 말했다. “미안한데 나 태훈이에요. 도훈이가 취해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요. 저기... 생일 축하해요.” 소이현은 몇 초간 침묵했다가 남편이 그녀의 생일을 잊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듯 한마디 불평 없이 그에게 강도훈을 잘 부탁한다고만 했었다. 고태훈은 소이현이 정말 강도훈을 많이 사랑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 새벽, 강도훈이 고태훈과의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지나가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소파 쪽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익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복도 끝의 작은 방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곳은 소이현의 방이었고 2층 메인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방이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강도훈은 개의치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월요일, 출근 날. 강도훈이 씻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순자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풍성한 아침상을 차렸다. 식욕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식탁 앞에 앉았다. 이순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이현이 집에 없는 이틀 동안 정말 너무나 힘들었다. 강도훈이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 도우미에게 함부로 화를 내진 않았으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일반인들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대표님, 천천히 드세요.” 요리가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소이현이 한 것에 비하면 어딘가 부족했다. 이틀 만에 벌써 소이현이 만든 아침 식사가 그리워졌다. “아주머니한테 전화 왔나요?” 막 나가려던 이순자는 그의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라고요?” 강도훈이 미간을 찌푸린 걸 본 이순자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말했다. “아니요.”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한 번도 없었어요?”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