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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네... 전화도 없었고 제가 걸어도 받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절 차단한 것 같아요.” 탁. 강도훈이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차가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이순자가 속으로 생각했다. ‘사모님이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릴 때면 대표님이 심하게 화를 내셔. 사모님이 며칠 더 있다가 들어오길 바랐는데 지금 보니까 안 될 것 같은데? 외부인인 나조차도 대표님한테 강하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아는데. 사모님은 더 잘 알지 않을까? 처음부터 밀당 같은 수를 써서는 안 됐었어. 사모님 때문에 나도 힘들어지게 생겼구나. 짜증 나, 정말.’ ... 강도훈이 회사에 도착해 회의를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와 선물 상자를 가져다줬다. 열어보니 반지였다. 소이현이 결혼반지를 팔고 다른 주얼리 가게도 둘러봤다던 고태훈의 말이 떠올랐다. ‘이틀 동안 사라졌던 이유가 이 반지 때문이었어? 이따가 도시락을 싸 들고 회사로 찾아오겠네.’ 강도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반지 케이스를 닫고 아무렇게나 옆에 둔 다음 일에 몰두했다. 잠시 후 허재윤에게 전화를 걸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소이현이 회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그는 소이현이 이런 수작을 부리는 걸 싫어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반지 케이스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 월요일, 출근 날. 소이현은 시간 맞춰 출근했다. 금방 결혼했을 때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한번 강민호가 없는 가족 모임에서 강도훈의 어머니인 봉주은이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질책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밥만 축낼 뿐만 아니라 아이도 낳지 못하고 강도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며느리 얘기를 할 때면 창피해서 고개도 들 수 없다고 했다. 그때 강도훈도 자리에 있었지만 소이현을 감싸주지 않았고 어머니가 그녀를 비난해도 가만히 있었다. 그날 밤 소이현은 바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강진 그룹이 아닌 권성 그룹에. 권성 그룹은 설립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가총액이 수백조 원을 돌파한 과학 기술 회사였다. 대기업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라 비서직이라도 전국 최고 명문대 졸업생을 요구했다. 소이현은 한국과학기술원 졸업생으로 학력이 충분했고 가장 인기 있는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연구개발팀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술직은 보통 야근이 잦고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맡으면 밤도 새워야 하기에 강도훈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하여 비교적 한가한 행정직인 대표 사무실의 비서로 취직했다. 그 사실을 안 후 강민호는 그녀가 강진 그룹으로 오기를 바랐다. 강씨 가문의 회사라 출퇴근 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었고 또 덜 힘들고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소이현은 봉주은이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강진 그룹에 가면 그녀에게 굴욕을 줄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고 그녀가 강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다고 비난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권성 그룹에 다니면 그런 귀찮은 일이 없었다. 임신으로 지난주에 사직서를 쓰긴 했으나 이젠 제출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시 논문을 쓰려면 업계의 정보에 대해 많이 알아야 했다. 최첨단 과학 기술 회사인 권성 그룹에서 많은 자료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서 업무가 한가하여 논문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이현 씨, 오늘은 도시락 안 가져왔네요?” 옆자리 동료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소이현은 가끔 정성 들여 만든 도시락을 가져왔다. 점심시간이 되면 누구에게 주는 건지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 도시락은 다름 아닌 강도훈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강도훈이 술자리에 나갈 때면 무조건 술을 마시기에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도시락을 쌌다. 원래는 그가 직접 도시락을 가져가면 좋은데 귀찮다면서 가져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소이현이 그의 도시락을 회사에 가져갔다가 점심시간에 택시를 타고 강진 그룹으로 가져다줬다. 다행히 멀지 않아 시간은 되었다. 소이현이 말했다. “이젠 도시락 싸지 않으려고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때 비서실장 문수아가 성큼성큼 들어와 중대한 소식을 발표했다. “대표님께서 다음 주 월요일에 귀국하시니 각 부서의 문서를 완벽하고 정확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문수아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다들 서둘러요.” 권성 그룹이 지난 몇 년간 이룬 성장이 기적과 같았지만 가장 미스터리한 건 창업자였다. 그는 계속 해외에서 시장을 개척했고 회사는 부대표인 배현우가 맡고 있었다.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를 소이현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놀란 것도 잠시 이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강진 그룹. 한 여자가 예고 없이 강도훈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강도훈을 만나려면 예약해야 했지만 이 여자는 그럴 필요 없었다. 게다가 허재윤이 직접 1층까지 내려가 그녀를 맞이했고 강도훈에게 안내한 후 문까지 닫아주었다. 특별한 접대에 비서실 직원들은 충격과 호기심에 휩싸였다. “저 여자 누구예요? 엄청 예쁘고 분위기 있어요. TV에 나오는 연예인 같아요.” “대표님은 예정에 없는 만남을 싫어하시는데 오늘 한 여자 때문에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셨어요.” “제가 회사에 입사한 지 몇 년이나 되거든요? 대표님이 여자랑 사무실에 단둘이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추측하기 시작했다. “혹시 미래의 사모님이 아닐까요?” 비밀 결혼이라 친구들 외에는 강도훈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강도훈이 몸가짐이 바른 남자라서 스캔들이 없었기에 이성에게 이토록 특별한 대우를 하는 모습이 매우 이례적이었다. 하여 미래의 사모님이라는 추측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사무실 안. 강도훈은 하연서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췄다. 그녀는 강도훈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양손을 책상에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뒤 그의 휑한 손가락을 보며 물었다. “반지 못 받았어?” 강도훈이 잠깐 멈칫했다. “네가 보낸 거였어?” ‘소이현이 사준 게 아니고?’ “어젯밤에 너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송 교수님 쪽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약속 취소했잖아. 보상으로 준비한 선물이야.” 하연서가 약지에 낀 반지를 보여줬다. “이 브랜드에 남자 반지가 많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게 이 커플링밖에 없더라고. 난 그냥 재미로 끼고 다닐 거야. 너한테 준 것도 예쁜 디자인으로 골랐어. 싫은 건 아니지?” 말은 그렇게 해도 강도훈이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강도훈은 그제야 그 반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게 생각났다. 몸을 숙여 다시 반지를 주웠다. 아까의 혐오감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하연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버렸어?” 강도훈은 그녀의 속셈을 바로 간파했다.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꼈다. 그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네가 보낸 건 줄 몰랐어.” 하연서의 안색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강도훈이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결혼반지를 절대 끼지 않는다고 했던 고태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이유가 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화났어?” 그러자 하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싫어하는 건 이 반지가 아니잖아.” 반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어?” “응. 예뻐.” 강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제 뭐 했어?” “교수님의 프로젝트가 한 곳에서 막혔거든. 밤새 자료를 봤는데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어. 다행히 내 동창네 회사가 이 기술과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어서 나중에 걔한테 물어보려고.” 그 회사의 대표가 바로 박지연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한국과학기술원 동문이었고 게다가 그녀의 후배였다. 동문이라 친분을 맺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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