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소이현은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장세영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느끼고 한마디 덧붙였다.
“저 그 사람하고 이혼했어요.”
장세영이 화들짝 놀랐다.
“이혼했다고요? 이현 씨 대표님을 엄청 사랑하잖아요...”
“그렇게 됐어요.”
뜻밖에도 장세영은 이 사실을 금세 받아들였다. 소이현의 결정이 충분히 이해되었으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강도훈이 소이현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데 무슨 이유가 더 있겠는가?
“그럼 대표님 정말 하연서 씨랑 결혼한대요?”
장세영은 묻고 나서야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물어서는 안 됐었는데.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저도 모르겠어요.”
소이현이 3년 동안 애를 써도 녹이지 못한 강도훈의 마음을 어찌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더 나눌 얘기가 없어 두 사람은 전화를 끊었다.
소이현은 문득 하연서가 떠올랐다.
강도훈을 만나기 전부터 소이현은 하연서를 알고 있었고 하연서가 강도훈의 첫사랑이라는 건 결혼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하연서를 알게 된 경위가 아주 복잡했다. 간단히 말하면 소이현의 이모와 관련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사고가 난 후 외삼촌은 해외로 이주했고 이모가 할아버지 대부터 일구어 온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이모는 갑자기 하연서의 아버지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하연서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이가 셋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이모는 망설임 없이 하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그렇게 이모는 하연서의 새어머니가 되었다.
당시 하씨 가문은 인천에서 별 볼 일 없는 작은 회사를 운영했다. 이모가 전 재산을 쏟아부은 덕에 지금의 하나 그룹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모가 몇 년간 경영한 끝에 하씨 가문은 인천의 명문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하연서 역시 재벌가의 딸로 성장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소이현과 이모의 관계는 아주 돈독했고 이모가 하씨 가문에 시집간 후에도 자주 만났다. 소이현은 이모를 친어머니처럼 의지하며 따랐다.
그런데 그녀가 강도훈과 결혼한 후부터 이모의 태도가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소이현은 처음에는 이모에게 새로운 가정이 생겼으니 조카에게까지 정성과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한동안 서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모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는 이모를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모의 태도 변화가 단지 새 가정이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강도훈과 결혼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수요일 저녁에 시간 돼?”
박지연의 전화에 소이현이 하던 생각을 멈췄다.
“응. 돼.”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난 소이현이라 목소리만 들으면 아무 이상도 알아챌 수 없었다.
“왜?”
“라일락 레스토랑 가자. 내가 밥 사줄게.”
...
권성 그룹 대표의 귀국이 코앞이라 소이현은 이번 주 내내 야근해야 했다.
수요일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박지연이 말한 장소에 도착했다.
레스토랑 앞에 도착한 그때 박지연이 어두운 얼굴로 레스토랑에서 걸어 나왔다.
소이현이 물었다.
“왜 그래?”
박지연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 생일에 밥 못 사준 거 오늘 사주려고 했는데 어떤 빌어먹을 놈이 통째로 빌렸다지, 뭐야.”
‘생일?’
소이현의 올해 생일에 박지연이 만나자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 임신 사실을 막 확인했던 터라 생일날에 강도훈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박지연을 거절했었다.
그날 강도훈은 일찍 들어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자정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을 때 고태훈이 받았는데 강도훈이 친구들과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그녀의 생일이라는 걸 잊어버렸다고 했다.
다음 날 소이현은 참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내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 기억하냐고 물었다. 꼬박 하루를 기다린 끝에 강도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소이현은 기대에 찬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하지만 메시지 내용은 이러했다.
[저녁 8시에 집에 들어갈 테니까 미리 밥 차려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소이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온몸이 차가워졌다.
결혼 3년 동안 그녀가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강도훈이 답장은 했지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하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보낸 메시지는 완전히 무시했다.
어느 정도 무관심해야만 이럴 수 있는 걸까?
소이현은 그때 스스로 다짐했다. 생일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생일은 그저 평범한 하루일 뿐이며 요란하게 축하할 필요 없다고 말이다.
하여 박지연이 그녀의 생일을 챙겨주려 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소이현은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차분한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너무 감동이야.”
“감동은 무슨. 자리도 예약 못 했는데...”
박지연은 독설을 퍼붓다가 마음이 아팠는지 이내 말을 바꿨다.
“됐어. 이건 내 잘못이야. 예약했어야 했는데. 평소엔 언제 와도 자리가 있었는데 오늘 통째로 대관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고는 작은 쇼핑백을 소이현에게 건네자 소이현이 냉큼 받았다.
“뭐야, 이건?”
“생일 선물. 일단 받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차 가지고 올게. 더 좋은 데 가서 밥 먹자.”
그러고는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소이현은 쿨하게 걸어가는 박지연의 뒷모습을 봤다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쇼핑백에 박힌 로고를 보니 주얼리 브랜드였다. 결혼반지를 팔았던 날 박지연과 함께 이 브랜드의 매장을 구경했었다.
안에 든 포장을 살펴봤는데 정사각형의 작은 케이스였다. 팔찌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날부터 내 생일을 챙겨줄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밥 먹자는 것도 거절했는데 이렇게나 세심하게 챙겨주다니.’
다시 한번 감동한 소이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며칠 만에 기분이 참 좋았다. 하지만 이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표님, 하연서 씨, 태훈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소이현이 길가 쪽으로 움직이자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이름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강도훈과 하연서가 나란히 서서 고태훈의 무리에게 둘러싸인 채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운데 선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강도훈은 걸으면서도 하연서를 힐끗 쳐다봤는데 소이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눈빛이었다.
소이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라일락 레스토랑 유니폼을 입은 매니저가 그들을 맞이했다.
“대표님, 준비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니저의 말에 하연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준비했는데?”
강도훈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
“곧 알게 될 거야.”
하연서는 궁금한 얼굴로 고태훈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줘, 태훈아.”
고태훈이 바로 답했다.
“잘 물어봤어. 내가 미리 가봤는데 네가 흰색을 좋아하는 걸 알고 도훈이가 레스토랑 전체를 흰색으로 꾸몄어. 남자인 나도 엄청 감동했다니까?”
강도훈이 싸늘하게 말했다.
“입 다물어.”
하연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말해봐. 듣고 싶어.”
고태훈이 말을 이었다.
“네가 백합꽃을 좋아하는 걸 알고 직접 수제 꽃다발도 만들고 세상에 하나뿐인 백합 목걸이도 맞춤 제작...”
강도훈이 고태훈을 제지하자 고태훈은 진작 예상한 듯 바로 옆으로 피했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형체를 보고는 흠칫했다.
“소이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