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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소이현은 길가에서 박지연의 차를 기다렸다. 그들과 약 7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어두운 밤인 데다가 행인들까지 있어 제대로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고태훈이 크게 외치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소이현이 흠칫 놀랐다. 당황한 와중에도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강도훈의 왼손이었다. 약지에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남성용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더욱 길어 보였다. 그리고 하연서도 반지를 끼고 있었다. 커플 반지였다. 말로 들은 것과 실제로 목격한 것의 충격은 차원이 달랐다. 소이현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삑삑. 그때 들려온 경적에 소이현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지연의 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조수석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차에 타라고 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차에 탄 다음 휙 가버렸다. 1, 2초 만에 일어난 일이라 고태훈이 충격받은 얼굴로 강도훈에게 물었다. “방금 우리를 무시하고 간 거야?” 아주 단호했고 표정마저 싸늘했다. 예전이었더라면 절대 가지 않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게다가 처음 보는 소이현의 차가운 모습에 고태훈도 크게 놀란 듯했다. 늘 존재감이 없던 여자에게서 왠지 모를 날카로움이 느껴졌고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이혼 때문에 싸우는 것을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런데 뭐가 다른지는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강도훈은 이미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걔 얘기는 꺼내지 마.” 고태훈이 하연서를 힐끗 쳐다봤는데 그녀 역시 소이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소이현이 그녀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더라도 이 고고한 태도를 유지했을 것이다. 눈치 빠른 고태훈이 말했다. “알았어. 얘기 안 할게. 분위기 망치지 말아야지.” 일행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소이현의 등장이 그들에게는 그저 해프닝에 불과했고 아무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예전에도 소이현을 만났었는데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평소 친한 사이가 아닌 터라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하연서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자리였다. 누가 눈치 없이 소이현과 말을 섞겠는가? 그나마 고태훈 정도 돼야 강도훈에게 농담을 던질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소이현을 언급했다가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연서가 강도훈이 좋아하는 여자라 다른 사람은 건드려도 하연서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하연서는 하씨 가문의 딸이고 귀한 신분이라 소이현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연서도 소이현을 마음에 담아둘 이유가 없었다. 그건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결국 사람들은 더는 소이현을 언급하지 않았고 하연서에게만 아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고태훈만이 강도훈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방금 소이현 씨가 들고 있는 쇼핑백 봤어?” 강도훈은 그녀를 대충 훑어본 탓에 자세하게 보진 못했다. 그가 짜증을 낼 것을 알고 고태훈이 서둘러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이현 씨가 결혼반지를 팔고 다른 주얼리 가게에 갔었다고... 아까 들고 있던 그 쇼핑백의 브랜드인데 아무래도 새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나 봐. 너랑 화해하려고. 그런데 타이밍이 좀 애매했네.” 강도훈이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소이현이 쇼핑백을 들고 있긴 했다. 고개를 숙여 약지에 낀 반지를 내려다봤다. 이건 하연서가 준 반지였다. 전에 이 반지가 소이현이 준 것이라고 한 번 오해했었다. 이제야 그를 달래려 하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밀당도 정도껏 해야지.’ 강도훈의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반지 낄 손가락이 없어.” 고태훈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없긴 왜 없어? 손가락이 한 개도 아니고.’ 고태훈이 뭐라 더 말하려는데 강도훈은 이미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소이현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누구 차를 타고 갔는지 강도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늘 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연서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해주는 것이었다. 고태훈은 무리에서 뒤처져 느릿느릿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으로 한번 뒤돌아보았을 때 소이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분명 여자였다. 소이현의 마음속에 강도훈 말고 다른 남자가 없었기에 여자인 게 어쩌면 당연했다. ...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소이현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그녀의 지난 생일들과 오늘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더 아렸다. 한참을 진정한 후에야 소이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25일 남았어.” 박지연은 소이현이 울거나 원망하며 징징댈 것이라 예상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현장을 목격한 건 엄청난 충격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25라는 숫자가 튀어나왔다. “25일? 그게 뭔데?” “이혼 숙려 기간. 25일이 지나면 완전히 이혼할 수 있어.” 박지연은 소이현의 눈빛에 담긴 단호함을 보았다. 강도훈은 올해 28살로 얼굴도 반반하게 잘 생겼다. 강씨 가문은 인천의 명문가 중 하나였고 그가 강진 그룹을 맡은 후 대대적인 사업 개편을 통해 그룹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지금 인천에 신흥 부자들이 많이 등장해도 강씨 가문은 여전히 인천 피라미드의 꼭대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강도훈의 분위기, 학식, 수단과 능력은 젊은 세대 중 단연 으뜸이었고 매력적이었다. 여자가 능력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빛나는 것들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소이현이 그의 겉모습만 보고 지금까지 자신을 맹목적으로 희생했던 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3년 전 소이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멘탈이 무너진 그녀는 실수로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그때 강도훈이 친구들과 요트 파티를 즐기던 중이었는데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일로 소이현은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그 후 그녀는 은혜를 잊지 못했고 박지연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을 세고 있었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이젠 정말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깊이 사랑했던 만큼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헤어 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 빌어먹을 놈들 신경 쓰지 말고 선물이나 열어봐.” 박지연은 소이현이 또 마음이 흔들릴까 봐 걱정했으나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소이현도 주의를 돌리고 싶었던 터라 순순히 포장을 뜯었다. 목걸이일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반지였다. 그것도 여성용 반지 한 쌍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나타났다. “왜 반지를 두 개나 줘?” “김칫국부터 마시긴. 두 개 다 너 주는 게 아니라 하나는 내 거야. 우리 둘 우정 반지.” “절친한테 선물로 반지를 주는 경우는 드문데?” “그건 고정관념이야. 다이아몬드 반지를 남자한테 받아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나도 너한테 줄 수 있어. 네 약지에 생긴 반지 자국이 너무 거슬려. 내가 준 거 끼면 딱 가려질 거야. 그리고 나쁜 기운도 쫓아낼 수 있을 거고.” 말을 마친 후 박지연은 소이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고 고맙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소이현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박지연은 그녀에게 농담을 건네려 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에 뭐라 하지 못하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 박지연의 침묵 덕에 소이현은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정리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박지연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친한 친구의 위로였다. 그리고 이 선물은 그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었다. 소이현은 반지 케이스를 꽉 쥐고 박지연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안심시켰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박지연은 소이현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김에 새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소이현이 프리 아파트로 이사한 후 누군가를 집에 데려가는 건 처음이었다. 박지연에게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 소이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누나, 민찬이가 거래처랑 술 마시다가 너무 많이 마셔서 급성 위염으로 지금 병원에서 수액 맞고 있어요. 병원에 와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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