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강윤서의 눈가에 찬 분노를 낱낱이 지켜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 사이에 계약을 체결한 적도 없고 이번 투자가 원래 합법적이지도 않잖아.”
강윤서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건 그녀의 제안이니까.
본인 덫에 걸린 셈이니 아무리 억울해도 참아야만 했다.
그녀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고 입을 벌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휴대폰이 다시 울리자 강윤서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 얼른 볼일 보러 회사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난 후 동료가 들어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윤서 씨랑 싸우는 날도 있네?”
“우리 헤어졌어.”
동료는 내 말을 전혀 안 믿으며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결혼을 앞두고 뭘 새삼스럽게. 부부 싸움은 원래 칼로 물 베기라잖아.”
나는 가볍게 웃을 뿐 더 해명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니까.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다. 부모님은 거실에서 무언가 의논하는 듯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나를 보더니 두 분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주방에 가서 부모님께 생수 두 잔을 따라드렸다.
“아빠, 엄마,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해요.”
강윤서와 나에 관한 일을 대충 들으신 거겠지.
아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원 그룹에 대한 투자를 철수했다며?”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두 분 모두 화들짝 놀랐고 엄마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너 그리고 파혼할 생각이라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윤서랑 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엄마는 내 이마를 문지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열나는 건 아닌데?”
나는 그런 엄마의 손을 다잡고 나긋하게 말했다.
“파혼했다는데 엄마, 아빠는 안 기쁘세요?”
이에 두 사람 모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우현아...”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윤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지금 이러는 거 엄만 조금 무섭네? 혹시 무슨 타격이라도 받았니?”
엄마, 아빠는 늘 강윤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없이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녀가 절대 나한테 진심이 아닐 거라며 꼭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나는 그런 부모님과 엄청 많이 싸우면서 하마터면 가족의 연을 끊을 뻔했다.
전생에서 죽을 때까지 나는 강윤서의 가스라이팅에 모든 판단력을 잃고 강원 그룹까지 덥석 내주었다.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강윤서는 쓰레기 버리듯 나를 차버리고 이건우와 함께 결혼에 골인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엄마는 걱정 어린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생에 나는 부모님을 위해서 강윤서에게 애원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대답이었다.
“너희 집안에서 자초한 일이야!”
자초한 일이라고?
강윤서를 사랑한 것이야말로 내가 자초한 일이겠지.
지금 부모님은 편하게 지내신다. 나 때문에 속을 썩이며 한탄하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손등을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 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이번엔 진짜 끝낼 테니까 두 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방에 돌아온 후 나는 사립탐정에게 연락해 강윤서의 뒤를 캐라고 했다.
강윤서와 이건우는 절대 최근에 만난 사이가 아니다. 전에 신경 쓰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이 뇌리에 솟구쳤다.
강윤서는 가끔 출장 간다는 핑계로 한동안 나가 있었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으며 나를 대하는 태도도 한결 상냥해졌다.
가끔은 사소한 선물을 받고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다.
내가 사준 값비싼 액세서리는 좀처럼 착용하지 않더니 길거리 싸구려 선물을 받고 한참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탐정이 내게 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건우야, 우리 함께 있자. 이제 가지 마.”
영상 속 강윤서는 술에 취해 눈이 풀린 채 이건우의 몸에 축 늘어졌다. 이건우는 그녀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에 키스했다.
두 사람이 곧 선을 넘으려던 찰나 강윤서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애교 조로 말했다.
“안돼, 아직은 아니야. 우현 씨한테 약점 잡히면 안 돼. 조금만 참아, 건우야.”
이건우는 그녀의 긴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알았어. 얼마든지 기다릴게.”
둘은 마치 애틋한 연인 같았고 나는 그 둘을 훼방하는 망할 녀석이 됐다.
내 눈빛이 음침하게 변해갔다.
‘줄곧 연락하고 있었네! 진작 날 배신했던 거야.’
원래 천천히 복수하려 했는데 이 영상을 보고 둘의 대화를 들으니 타오르는 이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꽉 잡고 사색이 되었다.
강윤서는 애초에 목적을 갖고 내게 접근했다.
이 세상에 나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을까? 날 사랑하는 줄 알고, 진심 어린 이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니...
‘강윤서, 네가 날 인간 취급도 안 했어! 이제 이건우랑 어디 한번 잘살아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