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대표님 아니에요?”
유영자의 말에 고수혁은 아마도 어딘가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이내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대표이사로서의 단호한 말투가 들렸다.
“조여진, 내일 재무팀 가서 퇴직금 받고 고성 그룹에서 나가! 더는 출근할 필요 없어.”
말을 마친 뒤 약상자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온 고수혁은 차가운 얼굴로 침대 옆에 바로 앉더니 내 발목을 잡고 내 종아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아플 거야, 참아.”
까만 눈동자로 내 무릎 위에 말라붙은 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소독용 면봉을 꺼내 내 상처를 조심스럽게 소독하기 시작했다.
만약 어제 받은 사진들 속의 모습들이 이 사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부숴버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집중하는 표정을 보고 오래전 나를 사랑하던 그 고수혁으로 돌아간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젯밤 고수혁은 그 여자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아니, 어쩌면 지난 3년 동안 출장이라는 핑계로 내 곁에 없었던 수많은 날들,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그들은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다리를 거두고 고수혁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러고는 스스로 면봉을 들고 상처를 소독했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명확하고 날카로운 통증에 점점 정신이 들었다.
나와 고수혁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고수혁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무릎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고수혁, 우리 이혼하자.”
밤새도록 고민하고 내린 결심, 그리고 뼈를 깎는 아픔을 안고 내놓은 한마디였지만 고수혁은 전혀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남자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에 아무런 감정의 파동도 없었다.
“이혼? 너 할 수 있겠어?”
다섯 살 때 윤씨 가문에 입양된 후로 고수혁과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마음과 눈길이 고수혁에게만 쏠려 있어 늘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고수혁이 나를 깔보듯 말했다.
“화풀이로 하는 거면 재미없어. 그러다가 내가 진짜로 이혼하면 어쩌려고?”
나는 마음속의 슬픔을 참으며 비꼬듯 물었다.
“다른 여자와 아이까지 있는 사람 곁에 내가 왜 있어야 하는 건데”
고수혁은 봉황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어?”
쓴웃음을 지은 나는 코끝이 찡해져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 딸이 세 살쯤 돼 보이던데? 그럼 우리 죽은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아이가 태어났다는 거네?”
고수혁의 차가운 얼굴에 잠시 의미심장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진 분위기 속, 오랜 침묵 끝에 고수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미가 그렇게 마음에 걸려?”
그렇구나... 여자아이 이름이 다미였구나.
나는 힘없이 말했다.
“아이가 그저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거라면 나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
고수혁은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몸을 숙여 양손으로 내가 앉은 소파 양옆을 짚으며 나를 그의 품 안에 가둬버렸다.
필사적으로 고수혁을 밀쳤지만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 상태였기에 고수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을 내 얼굴 쪽으로 숙인 고수혁은 귀 가까이에 다가와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 너를 더 좋아해.”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고수혁이 불공을 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평범한 연인처럼, 잠자리에서도 정말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때 그 생각을 하면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였다.
고수혁은 붉어진 내 얼굴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생각났어?”
낯 뜨거워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고수혁의 얼굴을 보자 이내 마음이 풀린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고수혁, 우리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고수혁의 잘생긴 얼굴에 잠시 의미심장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더는 나를 품 안에 가두지 않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씨 가문 사모님 역할이나 잘해. 이런 투정은 통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젯밤 20억 원을 주고 산 그 증거들로 고수혁과 협상하려 했다.
이렇게 하면 고수혁은 아마도 이혼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수혁, 이혼 합의서에 서명해. 우리 좋게 헤어지자. 안 그러면 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수혁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통화’ 버튼을 누른 고수혁은 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집에 있어. 알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나에게 한마디 말했다.
“네 부모님이 곧 오실 거야.”
방금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수혁이 말하는 부모님은 내 양부모님이다. 그들은 나를 친딸처럼 대해줬기에 일단은 그들이 왔다 간 다음 고수혁과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래도 늦지 않으니까.
안 그러면 집에 오신 부모님이 매우 난처해질 것이다.
고수혁은 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나를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불당으로 갔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유영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
점심 무렵, 박인주와 윤태수가 도착했다.
“아빠, 엄마, 오셨어요! 저녁 준비 마침 다 됐는데, 일단 앉으세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내가 다리를 절뚝이는 것을 본 박인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리는 왜 그래?”
그들이 알면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실수로 넘어졌어요.”
윤태수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다 큰 어른이 아직도 걸을 때 넘어지는 거야? 병원에는 갔어?”
“네,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나는 급히 얼버무렸다.
박인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수혁이는?”
고수혁의 이름을 듣자 나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불당에 있어요. 가서 불러올게요.”
그러자 윤태수는 급히 나를 막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르지 마. 우리가 기다리면 돼.”
아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비굴함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윤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비록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업에 소질이 없었던 오빠 윤경민 때문에 윤씨 가문의 사업은 날이 갈수록 내리막길을 걸었다. 최근 몇 년 사이 해항시 상류 사회에서는 거의 퇴출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고씨 가문의 사업은 고수혁이 물려받은 후 고성 그룹은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여러 기업들을 연이어 인수하면서 비즈니스를 계속 넓혀갔다.
지난 몇 년 동안 고성 그룹이 윤씨 가문을 계속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윤씨 가문은 분명 경쟁자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래서 윤태수와 박인주는 고수혁을 아주 깍듯이 대했다.
예전에는 큰 어른으로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엄을 풍겼지만 지금은 도움을 청하는 비굴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오늘 나 때문에 고수혁은 많이 불쾌했는지 부모님이 도착한 지 두 시간이 지나도 고수혁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유영자를 통해 고수혁에게 부모님이 기다린다고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당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우리 부모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만 같았다.
박인주도 무언가를 느낀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세영아, 어제 서아현에게 스폰서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 얼굴이 찍힌 사진은 아니었지만 뒷모습을 보니 수혁이 같아 보였어. 혹시... 정말 수혁이야?”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눈시울이 시큰거려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바로 그때 유영자가 급히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이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