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아씨,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아씨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파란색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이 땅에 엎드려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나무 비녀에 의해 얌전하게 묶여 있었다.
비록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으나 절세 미모인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어서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이 여인의 이름은 하연주.
하연주가 영국공부의 진짜 규수였고, 나는 유모에 의해 바뀌어서 영국공부에 들어오게 된 가짜 규수였다.
나는 하연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향을 피워 나왔을 뿐인데 이리 만날 줄이야. 1년 후, 어깨에 있던 모반이 국공 부인에게 발견되어 내 자리를 대신함으로써 부모님과 두 오라버니의 총애를 내게서 빼앗았지. 심지어 내 지아비마저 이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만약 전생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년을 죽였을 것인데.’
전생에서 나는 총애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에게 버림받은 것은 물론 지아비에게도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빼앗지 않기로.
‘어차피 나를 어찌 대할지는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의 몫이니.’
“아씨, 이 천한 노비는 저희가 은자를 주고 산 것이니 데려가야겠습니다.”
뒤쫓아온 두 사내가 황급히 달려오더니 애원하는 하연주를 제압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두 사내는 계집아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인신매매 상인들이군.’
하연주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씨, 흑흑...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아씨를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무엄하구나! 이분은 영국공부의 규수이자 수보 대인의 부인이시다.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말을 마친 내 수행원이 바로 울부짖는 하연주를 끌어내자, 두 인신매매 상인은 재빨리 앞으로 나와 하연주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하연주가 또 내게 도움을 요청할까 두려웠는지 바로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빌어먹을 년아! 뺨을 또 맞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 입을 다물라!”
한쪽 뺨이 빨개진 하연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인신매매 상인에 의해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구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루에 팔려 간 하연주가 처음으로 접대한 손님이 바로 태자와 함께 그곳을 찾은 우혁수였다.
그때, 우혁수는 하연주를 불쌍히 여겨 구해준 것은 물론 그 이후에도 그녀의 몸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특히 신경 썼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 그녀의 몸값을 치르고 우씨 저택에서 일하게까지 해주었고.
하연주가 자신을 구해준 우혁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관심을 보이자, 우혁수는 순수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착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이 바로 위독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루에 팔아넘길 때인 것 같군.’
머리채가 잡혔음에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게로 돌리며 애원하는 하연주를 바라보다가 나는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떴다.
“부인! 제발 한 번만 구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제발요!”
하연주의 애원에 두 인신매매 상인은 또 한 번 그녀의 뺨을 후려갈긴 후, 서둘러 사람 적은 곳으로 끌고 갔다.
내 마음에는 여전히 아무 동요도 없었다.
전생에는 항상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연주를 모함하고 다녔었다.
비록 하연주가 나를 해친 적은 없었으나 그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생에 마음을 비우기로 했던 것.
‘하연주를 해칠 마음도 없지만, 그렇다고 도와주지도 않을 것이야. 어차피 그녀는 하늘이 내린 여인이니 내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에 괜히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 필요는 없지.’
환생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향을 피운 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원을 지날 때 나는 연못 가운데 있는 정자에서 서책을 읽고 있던 사람을 보았다.
‘평소에는 해시가 되어야 돌아오던 인간이 오늘은 일찍 왔군.’
정자 난간에 기대어 있던 우혁수의 이목구비는 조각 같았다.
얇은 입술은 살짝 오므라져 있었고, 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며 긴 머리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날씬하고 우아한 그의 몸매를 더 돋보이게 한 흰색 두루마기는 마치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은 연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 보였고.
우혁수에게 있어서 서책이 전부인지라 나는 당연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서책보다도 못했다.
‘그럼에도 전생의 나는 그의 이런 모습에 빠져 사랑하게 되었지.’
비록 지금도 우혁수가 준수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으나 전생에서처럼 설레지는 않았다.
‘만약 평소였다면 다가가 이 사내의 뒤에서 어깨를 주물러줬겠지. 물론 소음을 싫어하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우혁수와 하연주가 교제하는 모습을 나는 예전에 몰래 본 적이 있었다.
‘연주는 마치 그림자처럼 혁수의 주위를 맴돌며 시끄럽게 굴었지. 심지어 가끔은 서책을 빼앗고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책이 중요한지, 아니면 자신이 중요한지 물어보기도 했고. 그럴 때면 혁수는 항상 애정 어린 눈빛을 한 채 연주가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만약 내가 그리 물었다면 아마 혁수는 어찌 답했을까? 아마 나를 밀치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을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우혁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하얀 비단에 푸른 대나무가 수놓아진 긴 치마를 살펴보았다.
가는 허리가 더 돋보이는 치마를 입은 데다 눈에 띄지 않는 옥비녀를 꽂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의 거만함이 없어지고 그 대신 우아하고 고요한 느낌을 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이런 모양의 옷을 입은 적이 없었으니, 이를 본 혁수가 약간 의아해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나를 쳐다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린 우혁수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아마도 평소 같았으면 내가 자기 곁으로 다가갔을 것으로 여겼겠으니 그리하지 않아서 화가 난 듯.
나는 우혁수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곧장 처소로 가서 이혼장을 작성하기로 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것이야.’
나는 다 작성한 이혼장을 가지고 정자로 갔다.
“안마는 필요 없소. 조용히 있고 싶으니 별일 없으면 오지 마시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평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우혁수의 건방진 태도에 대해 나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혼인할 때, 그는 벼슬에 오르기 위해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 나더러 당분간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어리석어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3년 동안 기다린 결과, 나를 사랑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장원급제하여 수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하연주를 사랑하게 되었고.
“할 말이 있으니 이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이혼장을 보고 모욕감이 느껴졌는지 우혁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내가 이런 식으로 모욕을 준다고 생각하겠지.’
우혁수가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수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와 만조백관들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런 비상시기에 이혼을 요구한 것에 대해 우혁수는 어이없어했다.
“애초 나와 혼인하겠다고 한 사람은 그대인데 이제 와서 왜 또 이러는 것이오? 바빠서 당신과 입씨름할 시간이 없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