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입씨름 게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내가 서 있었기에 앉아 있던 우혁수는 나의 진지한 눈빛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진지함은 그의 안색을 순간적으로 어둡게 만들었다.
우혁수는 성격이 차갑고 덤덤하여 화내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한번 화낼 때면 꽤 무서워서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에 바빴다.
물론 지금은 그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 내 할 말만 계속하고 있었고.
“예전에 서방님이 벼슬에 오르기 위해서 저더러 기다려 달라고 하셨죠. 해서 저는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18살이라 더는 기다릴 수가 없으니 인제 그만 놓아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3년이 아니라 10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이 사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니 나는 온몸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욕심을 내려놓아야 마음이 편안하군. 아마 전생에서 혁수가 연주를 아껴주는 모습을 많이 보다 보니 이리 무감각해졌을지도. 하나 이번 생에는 이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야.’
우혁수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응시했다.
“폐하와 만조백관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부인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 와중에 이혼하겠다는 것이오?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구려. 만약 내가 승낙하지 않으면 오라비에게 가서 고자질하려고?”
그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실 우혁수의 냉대 때문에 내가 온종일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본 큰 오라버니인 소성봉이 종종 우혁수를 찾아가 불만을 표출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소성봉에게 고자질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나는 우리 사이의 일을 소성봉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한 것이었으니까.
“부인!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아비와 오라비들을 내세워 나와 강제로 혼인한 것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이제 보니 3년 동안 차갑게 대했다고 이리 폭발한 것이구먼. 하면 내 지금 바로 따뜻하게 대해주지.”
말을 마치자마자 우혁수는 서책을 내던지고,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자기 그의 품에 안긴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생에 부부였다고는 하나 우혁수는 나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거니와 손도 한번 잡아주지 않았던 터라.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맴돈 데다 허리춤에 닿은 그의 손길이 또한 따뜻해서 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쑥스러운 것이 아니라 여인의 본능이어서 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혁수가 이미 방으로 돌아와 나를 침대에 눕힌 뒤였다.
‘연주와 몸을 섞었던 그 몸으로 나와 몸을 섞으려는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토 나올 것 같았다.
우혁수는 모욕감을 느꼈는지 경멸과 조롱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몸을 탐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싫다?”
그가 이리 말하는 연유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아버지를 동원하여 우혁수가 강제로 나를 취하게 했기에.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그로서는 이런 모욕을 감당하기 힘들겠지.’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킨 후, 고개를 들어 우혁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진심입니다. 혹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귀찮게 할까 걱정된다면 잠시 이혼 얘기는 꺼내지 말고, 각자 지내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정식으로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3개월 후, 혁수는 연주를 만나게 될 것이야. 그리고 서서히 그녀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다가 결국 저택에 들일 테고.’
전생에서 이를 막으려고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들을 시켜 우혁수에게 압력을 가하게 했으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하연주를 저택에 들이게 되었다.
1년 후, 하연주가 저택에 들어온 바로 그날에 나는 어머니를 시켜 소동을 일으켰다.
시녀와 하인들이 하연주를 잡아끌며 혼례복을 찢어버리자, 어깨에 있던 특이하게 생긴 붉은 모반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을 보자마자 하연주의 정체를 알아차린 어머니는 그녀를 껴안은 채 사람들의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하연주야말로 자신의 친딸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멍하니 서 있은 채 모두의 비웃음을 받았던 사실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서 이번 생에는 그런 꼴을 당하지 않겠노라고 나는 굳게 다짐했다.
‘반드시 이혼하여 혁수에게서 멀어져야 해. 어차피 연주가 저택에 들어오는 것을 국공과 국공 부인께서는 막지 않을 테지. 그리고 내가 떠나는 것도 당연히 막지 않을 것이고.’
국공 부인은 하연주가 자신의 친딸인 것을 안 후에도 나를 꽤 잘 대해주었으나 내가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하연주를 모함했던 것 때문에 국공 부인은 나를 차갑게 대하다가 결국 저택에서 내쫓았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가보다.’
우혁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혼은 부인이 혼자 정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이혼장을 작성할 것이니 부인은 그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시오.”
그가 조정에서 발판을 마련한 후에야 나를 내쫓을 생각이란 것을 난 알고 있어서 이에 동의했다.
“하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혼장을 누가 작성하든 상관은 없었다.
아마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우혁수는 안색이 더 어두워진 채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우혁수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시어머니인 진혜영이 시녀를 대동한 채 보양탕을 들고 왔다.
“혁수는 어디를 간 것이냐?”
자기의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진혜영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자, 국물 좀 마시거라. 향을 피웠고, 혁수와 동침까지 했으니 태아가 생겼을지도. 너는 너무 야위어서 많이 먹어야 해.”
그 말에 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3년 동안 우혁수의 시중만 드느라 나 자신을 소홀히 대했던 것.
게다가 우혁수의 냉대 때문에 나는 온종일 시름에 잠겨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이러니 내가 야윌 수밖에.’
우혁수를 놓아주기로 했으니 나도 이제 자신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렇게 말하고 나는 보양탕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내가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제야 진혜영은 비로소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님은 내가 정말로 혁수와 동침했을 것으로 여기고 손주를 볼 생각에 이리 좋아하는 거겠지.’
“그래, 그래. 하면 나는 이만 가보겠으니 편히 쉬고 있으려무나.”
진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누가 알았으랴.
줄곧 나를 친딸처럼 잘 대해주던 그녀가 내 정체를 알고 난 후에는 내게 주던 관심을 전부 하연주에게 줬다는 사실을.
‘아마도 시골 출신이라서 신분과 출생을 매우 중시하다 보니 그리했을지도 모르겠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우연히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한 통의 초대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누가 내게 초대장을 보내왔을까?’
“아씨, 그것은 선화 아씨께서 말경기에 초대한 초대장입니다. 아씨께서 안 가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고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것이고요.”
심선화, 나의 철천지원수이자 영국장군부의 적녀다.
나는 심선화의 무례하고 야만적인 행동을, 그녀는 나의 오만방자함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줄곧 싸우면서 자랐던지라 도성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나를 지지하는 세력들로 나뉘었다.
‘그런 철천지원수가 내게 은자를 주면서 잘 지내라고 할 줄이야.’
그때 심선화가 내게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사내에게 너무 순종하지 말라고 내 그리 일렀거늘. 네가 이리된 것이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야.]
당연히 심선화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던 나는 그 은자를 가지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결국 또 우혁수에게 상처받은 후 도성에서 쫓겨나 성 밖 백라언덕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우혁수에게 너무 순종한 탓에 그가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나를 우습게 보았던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순종하지 않고 내 삶을 살 거야.’
“다정아, 다영아, 화장 좀 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