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파혼
나는 당연하게도 강민지와 함께 나가기 싫었다.
강민지와 함께 가면 내 목숨이 붙어 있을지조차 장담 못 하기 때문에.
하지만 구소연, 그녀는 애초에 나를 쫓아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절대로 내가 여기 남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주성훈의 이름을 꺼냈다.
“구소연 씨, 저도 어쨌든 아저씨의 손님인데요.”
그러자 구소연이 코웃음을 쳤다.
“손님이요? 뻔뻔하게 눌러앉아서 내쫓아도 안 나가는 주제에 무슨 손님이죠?”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트집을 잡을 게 뻔했으니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곧 구소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맞혀볼까요? 성훈이는 아직 당신한테 정신병 앓았던 거 모르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쳐다봤는데 눈빛엔 노골적인 조롱과 고소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묵묵히 구소연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구소연은 내가 주성훈 사람들에게 정신병원에서 구출된 사실을 모른다.
이건 뭘 뜻할까?
주성훈과 그녀가 모든 걸 다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이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곰곰이 계산했다.
그때 강민지가 다가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은진아, 착하지? 너 머리에 문제 있잖아. 어서 나랑 가자.”
나는 재빠르게 몸을 빼며 피했다.
그러자 강민지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더니 당장이라도 나를 때릴 듯한 기세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구소연도 차갑게 말했다.
“제가 사람 시켜서 당신을 내쫓아야겠어요?”
구소연의 지원을 얻은 강민지는 더욱 기고만장해졌고 다시 내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은진아, 가자. 소연 씨 귀찮게 하지 말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이번에 강민지는 내 손가락을 거칠게 비틀었다.
“악!”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오자 강민지는 구소연을 향해 능청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얘가 충격을 받아서 아마 발작을 하는 것 같아요. 얼른 데리고 나가야겠네요.”
그 말과 동시에 강민지는 내 손가락을 다시 꾹꾹 눌러대며 나를 질질 끌었다.
다친 손이 다시 다치는 고통을 느낀 나는 참을 수 없어 몸까지 덜덜 떨렸다.
그러다 그동안 강민지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일들이 번개처럼 스쳤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부상 중이긴 했지만 강민지 하나쯤은 거뜬히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당에 있는 그녀의 경호원들이 따라 들어오지 않은 덕에 지금이야말로 반격할 기회였다.
다만 강민지가 임신 중이라는 걸 알기에 나도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강민지는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몇 번 몸을 떨고는 조용해졌다.
나는 조금도 불쌍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민지 또한 한 번도 나를 가엾게 여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왜 그럴 의무가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강민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뱃속의 아이? 운이 좋으면 살고 안 좋으면 죽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냉혈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애초에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를 나는 결코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안고 있다.
원망이 있다면 바람피운 엄마와 자제심 없는 아버지를 원망해야 한다.
강민지를 처리하고 나니 그제야 나는 숨통이 트였다.
그런데 구소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더니 비웃듯 말했다.
“제 구역에서 설치다니... 제법이네요?”
그녀의 눈은 싸늘했고 경멸로 가득했다.
얼마 후,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구소연 씨, 지금은 제가 나갈 수 없어요. 아저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끊어버렸다.
“이 사람, 당장 내쫓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구소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가 나를 쫓아내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도우미들에게 지시를 내릴 줄은 몰랐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내가 주씨 저택에서 겪은 일들을 강민지에게 흘린 것도 구소연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주성훈이 있는 집에 감히 강민지가 찾아올 리 없었다.
구소연은 쓰러진 강민지를 흘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도 같이 내보내.”
그녀의 거만함은 나만을 향한 게 아니었다.
집안 배경이나 지위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라면 누구든 똑같이 내려다본다.
그러자 도우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내가 주성훈이 직접 데리고 온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구소연은 그 모습을 보자 성을 내며 소리쳤다.
“아직도 안 움직이고 뭐 해?”
그제야 몇 명의 도우미가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모두 주씨 가문의 식솔들이었기에 나도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쫓길까 봐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소연 씨, 여긴 주씨 저택입니다. 당신이 저택 사람들을 부릴 자격은 없습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주경민이었다.
그는 막 바깥에서 돌아온 듯했고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구소연을 보며 계속 말했다.
“도련님께서 전하셨습니다. 구소연 씨는 앞으로 이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하라고요. 지금 당장 나가 주시죠.”
구소연의 아름답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다시 한번 말해 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주경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구소연과 눈을 맞췄다.
아마 주성훈 곁에서 오래 일한 탓인지, 그의 표정과 기세는 주성훈을 빼다 박았고 얼굴엔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묵직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구소연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성훈이가 제가 이런 꼴을 당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겠어요?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지금 바로 전화할 거라고요!”
그러나 주경민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두 집안의 약혼은 이미 없던 일이 됐습니다. 구소연 씨, 더 이상 저희 도련님을 괴롭히지 마시죠.”
그 말에 나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만 해도 주성훈이 그들의 약혼 이야기를 꺼냈는데 오늘 이렇게 끝이라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지만 주씨 가문과 구씨 가문은 제도에서도 손꼽히는 집안이다.
혼인 이야기가 오가든 말든 그 속사정은 외부인이 감히 알 수도, 입을 댈 수도 없는 일이다.
구소연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요! 저희 부모님이 절대 허락 안 하실 거예요! 제 오빠도 성훈이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을 거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지만 주경민은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 곧 뒤에 서 있던 보디가드에게 간단히 지시했다.
“구소연 씨를 모시고 나가.”
구소연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지만 좋은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끝내 치졸한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주경민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높이 들고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러다 몇 걸음 만에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마치 나를 산 채로 토막 낼 듯한 기세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완전히 원수가 되었구나.’
구소연이 사라진 뒤에도 강민지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주경민이 내게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깨우죠.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우미가 찬물을 들고 와 강민지의 얼굴에 끼얹었다.
강민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더니 짐승마냥 이빨을 드러내며 날 향해 악을 썼다.
“소은진! 네가 감히 날 걷어차? 너 죽을 줄 알아! 내 뱃속의 애 잘못되면 네 아버지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그녀의 악담을 조용히 받아냈다.
그녀가 소석진의 이름을 꺼내 날 위협했지만 이제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예전엔 바랐던 적도 있었다.
소석진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주길.
그러나 그는 번번이 날 실망시켰고 번번이 내 목숨을 노렸다.
그의 눈에는 강민지밖에 없었다.
나는 소석진에게 단지 돈줄을 막는 귀찮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가 얼마나 사람 탈을 쓴 짐승인지 이제는 뼈저리게 안다.
나는 그저 하늘이 왜 아직 소석진같은 인간을 데려가지 않았는지 한탄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민지는 계속 소리쳤다.
“당장 이거 안 풀어? 이 시*년아!”
나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 풀면 어쩔 건데? 너는 날 정신병자라고 증명까지 해줬잖아. 그런데 너 모르지? 정신병자는 사람을 때리거나 죽여도 처벌 안 받는다는 거.”
말을 끝낸 나는 일부러 탁자 위에 있던 과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칼끝을 그녀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놀렸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강민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널 죽일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네가 내 두 손을 망가뜨린 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그리고 의도적으로 말을 길게 끌었다.
“그러니까... 네 손을 잘라버리면 되겠네.”
내 말에 강민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 너 감히!”
나는 강민지를 비웃으며 주경민을 향해 돌아섰다.
“사람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이내 그가 뒤에 서 있던 보디가드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즉시 앞으로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강민지를 억누르게 했다.
그리고 과도를 들고 그녀의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그대로 힘껏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