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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주성훈에 대한 마음

나는 조금 당황했고 고개를 들었을 때, 주성훈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설마 그동안 날 도운 건 이 일을 위해 미리 준비한 걸까? 다시 말해 처음부터 날 ‘방패’로 쓸 계획이었던 걸까? 처음의 충격은 사라지고 머릿속은 온통 혼란뿐이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성훈도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네 마음이 결정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나는 멍한 상태로 대답했다. “네. 아저씨, 안녕히 주무세요.” 서재를 나와서도 나는 여전히 충격과 혼란 속에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 처음부터 나를 여자 친구로 세우려 했다면 구소연이 나를 겨냥한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주성훈의 의도적인 유도도 있었을지 모르기에 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세상에 남을 무조건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어차피 구소연은 이미 우리 두 사람을 오해하고 있다. 내가 그의 여자 친구 행세를 해도 기껏해야 그녀의 적대심은 더 심해질 뿐이다. 그리고 주성훈은 나 대신 소석진과 강민지를 무너뜨려 줄 것이다. 그렇다면 손해 볼 건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선뜻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싹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성훈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완벽한 사람, 매번 하늘에서 내려온 신처럼 나를 구해주는 사람한테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감정을 계속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애초에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 마음은 결국 아무 결실 없이 끝날 것이다. 게다가 내 삶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와 독사 같은 계모까지 감당해야 한다. 주성훈에게 다가갈 기회를 애초에 나 같은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 그렇게 뒤척이던 나는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히려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한참을 꾸물대며 세수하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한 뒤에야 겨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성훈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도우미들의 말에 따르면 전화 한 통을 받고 급히 나갔다고 했고 주경민도 함께였다. 곧 정혜경이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이 나가기 전에 보양식을 푹 고우라고 하셨어요. 어젯밤에 아가씨가 못 주무셨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주성훈은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더듬거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정혜경이 씩 웃었다. “대표님이 참 아가씨를 아끼시네요. 예전에 구소연 씨가 와도 눈길 한번 안 주셨는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국만 후루룩 삼켰다. 다행히 아주머니도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고 간단히 몇 마디를 나누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방으로 돌아왔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머릿속에 자꾸 소석진과 강민지의 독기 어린 얼굴이 떠오르고 엄마의 쓸쓸했던 장례식이 떠올랐다. 또 얼마 뒤에는 어젯밤 주성훈이 꺼낸 제안이 떠올라 머릿속은 너무 어지러웠다. 그렇게 얼이 빠진 채로 지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마침내 주성훈의 차가 마당에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들어올 때, 나를 보지 못했고 뒤따라오는 주경민의 보고를 들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여름이 시작된 때였지만 주성훈은 여전히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렸고 셔츠 단추는 위에서 두 개가 풀려 있었다. 그 차림새에 감출 수 없는 탄탄한 몸매까지 더해지니 마치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주성훈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어서 오히려 금욕적인 기운이 더 짙어졌다. 내 심장이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심장은 조금씩 더 빠르게 뛰는 것 같다.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얼른 주성훈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그제야 그의 시선이 나한테 향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응.” 주성훈은 짧게 대답하더니 손에 든 서류를 주경민에게 건네고 나를 한 번 바라봤다. “따라와.” 나는 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주성훈이 다시 돌아서서 주경민에게 말했다. “너도 와.” 순간, 나는 살짝 놀랐다. 어젯밤 이야기를 하려던 터라 솔직히 제삼자가 있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주경민은 그의 오른팔 같은 존재다. 어쩌면 내가 ‘가짜 연인’이 되는 일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주성훈은 아무렇지 않게 책상 뒤에 앉아 서류 한 장을 들여다봤다. 사실 그는 꽤 바빠 보였기에 조금 머뭇거리던 나는 물었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주성훈은 무심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말해.”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어젯밤 하신 제안, 잘 생각해 봤어요.” 주성훈은 손짓으로 계속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못 하겠습니다.” 그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나는 그 달콤한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 것이고 결국 주성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서재 안에는 내 숨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성훈을 보았는데 그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화를 낼까, 나를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할까 겁이 났다. “이미 너무 많이 도와주셨어요. 저는 아저씨한테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이건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나만 알고 있다. “진짜 여자 친구가 필요하시다면 그냥 한마디 하세요. 분명 기꺼이 돕겠다는 여자가 많을 거예요.” 주성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주경민에게 말했다. “가져다 줘.” 나는 의아해졌다. 그러자 곧 주경민이 내게 서류봉투를 건넸다. 받아 든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건 사진 몇 장이었고 사진 속 인물을 확인한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 강민지가 한 남자와 껴안거나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몇 장은 노골적인 침대 사진까지 있었다. 그 남자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고등학교 동창, 이름은 도하민, 강민지와 같은 고향 출신이며 둘은 중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그리고 함께 화림으로 유학을 온 사이라고 들었다. 나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 그 밑에 깔린 서류를 꺼냈다. 그건 호텔 투숙 기록이었다. 두 번째 페이지의 어떤 날짜가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강민지가 임신한 시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즉, 그녀의 뱃속 아이는 도하민의 아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충격적인 사실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강민지가 거짓 임신으로 엄마를 자극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임신을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소석진의 아이가 아니었다. 강민지는 소석진을 ‘아버지’로 내세워 그의 돈으로 아이를 키울 생각이었다. 소석진은 강민지를 보물처럼 아끼고 뱃속의 아이를 목숨처럼 생각했다. 만약 그가 이 아이가 ‘사생아’라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그래도 용서하겠지.’ 그는 강민지를 위해 친딸에게조차 독을 먹일 사람이니까. 허탈하게 웃던 나는 한참 후에야 낮게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 주성훈이 주경민을 쳐다보자 주경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나는 사진을 쥔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원래는 결혼식장에 남자를 데려가 강민지의 연인 행세를 시킬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과 소석진을 망신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굳이 남자를 섭외할 필요도 없었다. 강민지와 도하민의 관계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계획을 실행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소석진이 강민지의 아이를 키우게 두고 몇 년 뒤에 폭로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표정은 정말 볼만할 테니까. 그런데 또 한편으론 억울했다. 소석진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는데 왜 그가 강민지의 사생아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결국, 그 돈도 모두 외할아버지 재산이니 말이다.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못 하던 나에게 주성훈이 문득 물었다. “정말 결정한 거야? 내 여자 친구 안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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