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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결혼식 참석

그 말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그저 ‘가짜 여자 친구’로만 있는 건데 주성훈의 말에는 마치 진심으로 내게 연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처럼 느껴졌다. “죄송해요, 아저씨. 그동안 저한테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성훈은 내 말을 뚝 잘라버렸다. “알았으니까 나가 봐. 경민이랑 얘기할 게 있어.”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주성훈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화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책상 위의 다른 서류를 집어 들고 주경민과 곧바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문밖을 나서던 순간, 주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석진 씨 건은 내가 동의했어. 사람 보내서 계약 체결하게 해.”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뭐지? 소석진과 협력하겠다는 건가? 그런데 어젯밤에는 여자 친구로 있어주면 소석진을 처리하겠다고 했었는데?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성훈은 어디까지나 사업가니 이익이 가장 큰 쪽을 택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그가 나를 위해 소석진과 연을 끊겠는가. 게다가 나는 방금 그의 제안을 거절한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서늘한 기분이 스쳤다. 혹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면 어떡하지? 당분간은 이 집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를 불쾌하게 만들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와 앉았지만 마음은 계속 가라앉지 않았다. 30분쯤 시간이 흐른 뒤, 아주머니가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주성훈도 있었다. 이미 식탁에 앉아 있던 그는 내가 내려오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성훈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아무런 파동도 없는 표정, 눈썹 사이에도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정말 화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성훈이 진짜 여자 친구를 원했다면 원해서 달려드는 여자들은 줄을 설 테니 내 거절 따위가 마음에 걸릴 리 없다. 나는 안도했지만 이렇게 단둘이 식탁에 마주 앉는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곧이어 주성훈은 턱으로 건너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나는 얼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침묵하며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해 그저 조용히 밥만 먹었다. 그러다 알게 됐다. 주성훈의 식사량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걸. 면 한 그릇을 가득 비우고 반찬들도 거의 다 먹어 치웠다. 그런데도 식사하는 모습은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귀족적이고 품위가 느껴졌다. 나 역시 어릴 적 외할아버지께 식사 예절을 배웠지만 그의 품격은 한 수 위였다. 아마 그게 집안의 차이겠지. 나는 밥을 다 먹었지만 곧바로 자리를 뜨진 않았다. 주성훈은 그런 나를 힐끗 보더니 정혜경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밥 따로 지어주시죠.” 나는 눈이 커졌다. 화림은 남쪽에 가까워 대개 면 위주의 식단이었고 나는 밥을 더 좋아해 오늘도 거의 먹지 못했는데 그걸 눈치챘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세심하게 챙기는 사람, 이런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나는 망설이다 감사 인사를 했고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가서 쉬어.” 이내 나는 주성훈이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냅킨을 뽑아 입가를 닦는 모습을 보았다. 그저 단순한 행동 하나인데도 어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 이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늘 주성훈에게 기대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등불 아래 주성훈의 눈동자는 깊은 연못 같았고 그 안에 내 모습이 비치자 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곧 주성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 편히 여기서 지내라. 네 손이 다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고.”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했는데도 나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배려해 주는 주성훈이 솔직히 너무 고마워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는 주성훈을 따라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방은 2층 복도 맨 오른쪽, 내 방은 맨 왼쪽이었다. “일찍 자. 밤새우지 말고.”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훑어보다가 계속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성훈은 어젯밤 내가 생각이 많아서 잠을 설치는 걸 걱정하는 듯했다. 방에 돌아온 나는 내 얼굴을 만지며 열을 식히려 애썼다. 사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그가 내게 내건 조건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성훈의 여자 친구인 척하라고 하면서 원수도 해결해 주겠다고 하니 생각이 흐려졌으면 진짜 그 제안을 받아들일 뻔했다. 다음 날 아침, 주성훈은 재단사를 데려와 내 몸 치수를 재게 했다. 내게 맞춘 드레스를 준비한다며 소석진과 강민지의 결혼식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한편이 씁쓸하면서도 감동스러웠다. 이토록 세심하고 배려 깊은 주성훈이 나에게 접근하는 데 목적이 있더라도 그가 분명 내게 잘해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유혹 가득한 그 제안을 거절한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매력에 빠져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 후 2주 동안 주성훈은 바빴는지 집에 거의 머물지 않았고 집에 와도 주경민과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우리는 만나는 일이 적어졌다. 어쩌면 하루 종일 마주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속으로는 주성훈을 만나고 싶었지만 또 그와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주성훈이 바빠서 보이지 않으니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결혼식 날이 다가왔고 전날 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민지와 도하민의 불륜을 폭로할지 말지 고민하느라 잠이 안 온 것이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새벽을 맞은 나는 다크서클이 가득 내려와 있었다. 주성훈에게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내려가기 전 진하게 화장을 했다. 그런데 주성훈이 내게 건 첫마디는 이랬다. “어젯밤 잠 못 잤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화장 괜히 했네.’ 곧 주성훈은 내 얼굴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화장 안 한 게 더 예쁘다.” 그 말에 내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하지만 주성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먹으러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다크서클과 짙은 화장,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안고 그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겨우 식사를 마치자 주성훈이 나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곧 누가 와서 스타일링 해줄 거야. 준비되면 우리 출발하자.” ‘언제 스타일리스트를 불렀지? 내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내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려는 찰나, 도우미들이 와서 스타일리스트들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나는 곧장 휴게실로 가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모든 걸 맡겼다. 재단사가 맞춰준 드레스는 하얀 머메이드 라인으로 재질도 고급스러웠고 라인도 내 몸에 딱 맞게 재단되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내 드레스에 어울리게 헤어스타일과 은은한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두 시간 뒤, 거울 속에는 낯선 여자가 비쳐 있었다. 청순해 보이면서도 화장 덕분에 은근한 매력까지 풍겼고 하얀 머메이드 드레스가 몸에 착 달라붙어 내 몸매를 한껏 돋보이게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맨얼굴이었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도 거의 입지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공들여 꾸미면 의외로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청순하면서도 유혹적이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하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나는 의아했다. 나는 아빠의 결혼식에 가는 건데 전 남자 친구 결혼식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화려하게 꾸밀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많은 공을 들였기에 나는 반대할 용기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스타일리스트가 나에게 하이힐을 신기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강민지에게 힐로 밟힌 기억 때문에 하이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도저히 신기 싫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나를 빙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이렇게 하죠. 더 안 해도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평평한 샌들을 신고 내려오자 스타일리스트들은 나를 둘러싸고 자기 솜씨를 자랑하려 했다. 정혜경이 제일 먼저 나를 보고는 정말 예쁘다며 칭찬을 늘어뜨렸고 나는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주성훈은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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